#73. 속리산 비경보다 더욱 아름다운 부부이야기

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by 파란동화


피앗재산장의 사장님 부부는 6년 전에 부부가 함께 백두대간 구간종주를 하셨다고 했다. 사장님은 원래 등산을 좋아하셨고 사모님은 등산에 큰 뜻은 없었지만 사장님의 걸음에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했다고 하셨다.




주말마다 부부가 함께 대간종주를 하여 완주하기까지 8개월이 걸렸다고 하셨다. 그 해 3월에 지리산에서 종주를 시작하여 11월에 진부령에서 대간종주를 마무리 하셨다며, 당시 사장님의 닉네임이 '다정' 이었고 사모님의 닉네임이 '다감' 이라 '다정다감한 백두대간 이야기' 라는 이름으로 블로그에 대간일기를 올렸다고 하셨다.





꺄아~!!
이런 순정만화같은 이야기라니!




사장님의 블로그에 들어가보니 함께 등산하는 사모님 사진을 가리키며 '우리 다감이' 라고 표현하신다. 사랑이 뚝뚝 떨어져 내리는 부부였다. 사모님 역시 '나는 등산도 별로고 시골도 별로다. 나는 도시가 좋다' 라고 계속 말씀하시면서도, 나에게 대간 종주기를 들려주시는 사장님 옆에서 연신 해맑은 웃음을 지어 보이셨다.




사장님 부부도 오늘의 나처럼 속리산 구간을 지나며 엄청난 폭우를 만나셨다고 한다. 바로 위 피앗재에서 밤새 폭우를 맞고 날이 밝자마자 이 곳 만수리로 탈출을 하셨다고 한다. 마을에 닿기도 전에 언제 그랬냐는 듯 하늘이 맑게 개었는데, 그 아침에 만난 이 마을이 운명처럼 다가왔다고 하셨다.




사장님부부는 백두대간 종주를 마무리함과 동시에 이 곳으로의 귀촌을 결정하셨다고 한다. 마침 매물로 나온 집이 있었고, 마을이 끝나고 등산로가 시작되는 곳에 있는 집이라서 더욱 마음에 들었다고 한다. 귀촌을 결정하면서 주 수입원은 표고농사로 하시고, 산장운영은 소소하게 하는 것이라고 덧붙이신다.




하지만 우연히 만난 곳 치고 산장을 운영하기에 이만한 명당도 없을 것이다. 백두대간 마루금과 충북알프스가 교차하는 지점이라 이 곳을 찾는 산객들이 꽤 있다고 하셨다. 피앗재산장에서 백두대간 능선인 속리산 피앗재까지는 30분 밖에 걸리지 않아, 주봉인 천왕봉과 문장대를 거치기 전 잠시 쉬어가기에 딱 좋은 위치에 있었다.




운명처럼 맞이한 인연도 놀라웠지만 사장님의 실행력이 더욱 놀라웠다. 우연히 하산한 곳으로 귀촌을 결정하고 대간 종주가 끝나자마자 집을 계약해 들어오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부부가 함께 손을 잡고 백두대간 종주를 했다는 것 부터가 나에겐 이미 환상 속 이야기로 들렸다. 비가 억수같이 내리는 날이면 사장님은 텐트 천을 펼쳐 사모님을 먼저 안으로 들어가게 하고, 본인은 비를 맞으며 타프를 설치하고 뒤늦게 텐트 팩을 땅에 고정하셨다고 했다.




그런 이야기들이 사장님과 사모님을 시골에 살고있는 보통 부부가 아닌 영화 속 주인공처럼 돋보이게 만들었다. 사진 속의 사모님은 비를 잔뜩 맞고 텐트 안에 앉아 있으면서도 소녀처럼 해맑게 웃고 계셨다.




장대비가 쏟아지고 천둥번개가 내려쳐도 함께 의지할 상대만 있으면 저렇게 해맑은 웃음을 지을 수 있는 거구나. 제 몸이 다 젖는 줄도 모르고 나를 위해 비를 막아주는 상대가 있으면 아무리 힘든 백두대간도 저렇듯 웃으며 이어갈 수 있는 거구나. 긴 긴 종주 내내 나에게서는 한번도 보여진 적 없던 표정이, 사진 속 사모님의 얼굴에서는 영원이 시들지 않고 피어있었다.




나의 인생에서도 폭우와 낙뢰가 떨어지는 순간에는 함께 의지할 수 있는 동반자가 있었으면 좋겠다. 나를 위해 비를 막아주는 동반자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나는 나 대신 비를 맞아준 그의 몸을 깨끗하게 닦아줘야지. 그렇게 서로의 온기로 폭우와 낙뢰를 헤쳐가는 사이가 되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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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5시에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안채로 건너가 사장님부부와 함께 아침밥을 먹었다. 그리고 다시 별채로 건너와 배낭을 싸고 있는데, 열려진 창문을 통해 사장님이 계속 이것저것 물으신다.




"오늘은 어디까지 갈 거에요?"




"천왕봉이랑 문장대 너머 밤티재까지 가 볼 생각이에요."




"통제구간도 진행하실 거에요?"




"네. 아마도요."




잠시 사라졌던 사장님이 작은 배낭을 가지고 오시더니 다시 말씀 하신다.




"박배낭 메고 가기에는 좀 힘들거에요. 여기에 당장 마실 물과 점심꺼리만 챙겨서 가세요. 박배낭은 제가 트럭으로 밤티재까지 옮겨다 줄게요."




나는 머뭇거리다가 그래주시면 정말 감사하겠다고 말씀 드렸다. 사장님이 주신 작은 배낭에 버너와 코펠과 점심으로 끓여먹을 누룽지를 챙겨 넣고 있는데, 사장님이 다시 오셨다.




"그것 다 빼고 이거 챙겨가세요.

집사람이 주먹밥을 싸주네요."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사장님의 호의는 끝날 줄 모르고 이어졌다. 안채로 가셨던 사장님이 다시 나오시더니




"문장대 도착하기 전에 저에게 전화 주세요. 제가 문장대로 올라갈게요. 이 날씨에 여자 혼자 통제구간을 건너는 건 너무 위험한 것 같아요. 제가 가이드 해드릴게요."




"네? 그래도 괜찮으시겠어요?

사장님 오늘 스케쥴은요?"




"오늘은 마침 할 일이 없어요.

집사람이 선유씨 걱정된다고 난리네요."




밖으로 나와보니 사모님은 흐린 하늘을 보며 잔뜩 인상을 쓰고 계셨다. 오늘도 비 예보가 있었고 예보상으로는 오후부터 비가 온다고 했지만 하늘은 당장이라도 비를 뿌릴 것 처럼 흐렸다.




"안돼. 안돼. 혼자가면 절대 안돼. 통제구간은 맑은 날에도 위험한데 이런 날씨에 그 암릉을 어떻게 여자 혼자 넘어 가. 절대 안돼."




사모님은 혼잣말처럼 허공에다 대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해서 오전 6시 10분, 나는 처음으로 당일 배낭을 메고 룰루랄라 노래를 부르며 오늘의 대간을 시작했다.




그런데 산장에서 30분 거리인 피앗재에 닿기도 전에 하늘에서 우르르 하는 천둥소리가 들려온다. 설마... 아침부터 비가 오는 건 아니겠지? 오늘의 비 예보는 늦은 오후부터 였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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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앗재를 지나 백두대간을 타고 천왕봉으로 향하는데, 낮게 우르르 소리를 내던 하늘이 우르릉쾅쾅 짖어대기 시작한다. 하늘을 찢고 나온 천둥소리가 나의 고막까지 찢을 테세다. 그러더니 7시 45분부터 하늘은 또 장대비를 퍼부었다. 어제도 그러더니 오늘도? 아 진짜 너무해! 나는 하늘에다 대고 짜증섞인 푸념을 뱉어냈다.




어제나 그제처럼 낮동안은 햇빛쨍쨍 덥다가 오후부터 소나기성 비가 올 줄 알고 물을 1리터나 챙겨왔는데, 아침부터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는 바람에 날은 춥고 몸은 떨리고 시야는 몹시도 갑갑했다.




피앗재에서 속리산의 주봉인 천왕봉까지는 능선이 완만하다더니, 과연 힘 한번 들이지 않고 도착했다. 정상석 주변으로 분명 사방이 탁 트인 조망지 같은데 짙은 안개와 빗줄기로 인해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보이는 것도 없고 사람도 없다. 이 넓은 속리산에 사람이라곤 오직 나 혼자 뿐이다. 명색이 국립공원인데도 말이다.




천왕봉을 찍고 이번엔 주봉보다 더 유명한 문장대로 향한다. 비를 맞으며 걷는 내내 오늘 암릉구간을 지나는 것은 무리다, 통제구간을 지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다, 오늘은 신선대에서 법주사로 하산하고 다음에 다시 대간을 이어가자, 라고 생각했다. 비도 비지만 천둥 번개가 쩌렁쩌렁 울려대니 편안한 능선 길에서도 심장이 덜컥덜컥 내려앉았다.




다행히 비로봉을 지나면서부터 천둥번개가 멈췄고 비는 오다 말다 했다. 비가 잦아들고 안개가 걷히니 비로소 아름다운 속리산이 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육산과 암산이 적절히 조화를 이룬 속리산은 완만한 흙길과 육중한 암릉을 두루 갖춘 산이다. 힘들만 하면 완만한 능선길이 휴식을 주고 힘들만 하면 암릉 봉우리가 기막힌 경치를 펼쳐보인다.




비로봉에서 신선대를 지나 문장대까지 이어지는 길은 넓고 높고 기막힌 암릉들이 줄지어 나타나는데, 그 아름다운 길을 지날 때는 비가 거의 오지 않았다. 어제 그제 그토록 장대비를 뿌려댄 대간이지만 이 아름다운 암릉을 지날때는 속리산의 풍경을 허락해주니, 그것만으로도 너무나 감사했다.




등산로에서 왼편으로 엄청 높은 암릉이 있었는데 암릉 과 빽빽한 나무 사이로 좁은 흙길이 나 있는 것이 보였다. 어? 이 높은 바위 위를 올라갈 수 있는 것인가? 호기심이 발동하여 좁은 흙길을 따라 올라가 보았다. 흙길은 암릉 꼭데기까지 연결되어 있었고... 암릉의 정상부는 예상과 다르게 엄청 넓고 평평했다. 열 여명의 사람이 거뜬히 누울 수 있는 너럭바위 아래로 속리산의 능선과 골짝이 거칠 것 없이 펼쳐보였다.





우와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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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여름의 초록 숲과 적절히 조화를 이룬 기암 위로 운무가 너울치고 있었다. 와아.... 미치겠다! 이런 풍경이라니! 이런 곳이라니! 우리나라의 국립공원은 어딜 가도 실망하는 법이 없다. 국립공원마다 모두 제각각의 매력을 자랑하고 날씨의 도움까지 받으면 이곳이 인간계인지 신계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장관을 보여준다.




우와아아아!

나에게 오늘 이 장관을 보여주려고

어제부터 그토록 비를 쏟아부은 거구나!




종잡을 수 없는 날씨마저 웃음으로 포용하게 된다. 암릉에서 내려다 본 속리산의 경치로 용서하지 못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 오늘의 백두대간 >

고산자 지도/ 남쪽에서 북쪽방향으로
총 24구간 중
8구간

진행 구간 : 피앗재 산장(충북 보은군)-피앗재-속리산 천왕봉-비로봉-입석대(충북 보은과 경북 상주의 경계)

진행 날짜 : 2012년 5월 29일~30일 / 화~수

SE-b7c726b3-90f5-4bbf-8224-45a861122a3f.png?type=w1 * 지도 : 고산자의 후예들/ 백두대간24 *









「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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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화수목금 주5일 연재됩니다~^^








파란동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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