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속리산 신선대를 지나면서 산장 사장님께 전화를 드렸다. 오늘 비가 너무 내려 아무래도 통제구간은 넘기 힘들 것 같다고 말씀드렸다. 하지만 사장님은 쌩쌩하게 말씀하신다.
"이정도 비는 문제 없어요.
지금 열심히 올라가고 있으니 좀 있다 만납시다."
지금은 비가 잦아들었지만 아까는 세상이 떠나가라 폭우와 천둥이 내리쳤는데 '이정도' 라고 표현하시니 어리둥절했다. 어쩌면 사장님이 있었던 지상에는 장대비와 천둥번개가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두개골이 깨질 듯 내려친 천둥번개와 장대비는 높은 산에만 집중적으로 쏟아진 것인지도 모른다. 등산을 하다보면 날이 개어 비가 그친 것인지, 내가 천리마처럼 이동하여 비구름의 영역 밖으로 벗어난 것인지 궁금할 때가 있다.
비로봉을 지나며 오다말다 하던 비는 신선대를 지나며 보슬비와 안개비의 중간으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문장대에 도착하기 10분 전, 이쪽으로 오고 계신 사장님을 만났다. 사장님을 만나 문장대로 이동할 즈음에는 비가 거의 그쳐 있었다.
속리산이 처음인 나에게 사장님은 문장대를 실컷 둘러보라고 하셨다. 넓고 평평한 봉우리를 뜻하는 ' 臺(대)' 라는 이름에 걸맞게 문장대는 해발 1000m가 넘는 곳임에도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죄다 넓고 둥근 암석으로 이루어진 곳이다. 어떤 학교에서는 소풍으로 문장대를 오른다고 하는데, 과연 한 학년의 모든 아이들이 돗자리를 펼쳐도 좋을 너럭바위의 향연이다.
우와..... 어쩜!
산 정상의 봉우리에 이런 바위가 있을 수 있을까?
감탄의 연속이다. 입을 다물지 못하겠다.
전망대처럼 계단과 울타리가 설치된 바위를 오르고 문장대 구석구석을 돌아본 이후에, 사장님과 나란히 앉아 사모님이 싸주신 점심을 먹었다.
이제 걷기 편한 국립공원의 등산로는 여기서 끝났다. 점심으로 배를 든든히 채운 후 나는 사장님을 따라 통제구간으로 들어섰다.
백두대간 구간 중 가장 지랄맞다는 속리산 암릉구간은 과연 명성대로 지랄 지랄 그런 지랄도 없었다. 통제구간이다보니 대간길에 선행자들의 리본이 하나도 없었고 이정표도 없었으며, 길은 수시로 두 갈래 세 갈래로 나뉘는데 풀이 우거져 등산로 식별도 쉽지 않다.
암릉 위를 기어가다 옆으로 돌아가다 바위 아래를 비집고 들어가기가 일쑤다. 사장님 뒤를 따라가면서도 이것이 길인지 전혀 모르겠다. 빈도시락과 약간의 생수만 짊어진 배낭으로도 체력이 쭉쭉 빠져나갔다.
사장님의 가이드가 없었다면 나는 절대로 이 길을 지나지 못했으리라. 등산로도 제대로 없는 이 곳에서 길을 찾는 것도 불가능이었을 것이고, 발 디딜 곳도 마땅찮은 바위지대를 혼자서는 절대 넘지 못했을 것이었다.
게다가 커다란 박배낭을 메고는 이 좁은 바위 사이를 그대로 지나갈 수도 없었다. 박배낭과 함께 한 산행이었다면 배낭을 벗고 메기를 스무번은 반복해야 했으리라. 설상가상 비까지 다시 내리고 있었다.
아흑... 사장님은 구세주야...
나의 목숨을 구하셨어... 흑흑...
만약 혼자서 이 곳을 지나려 했다면 아무도 없는 고립된 숲에서 세 시간 정도 알바하고, 빗 속에 엎디어 철철 울다가 구조요청을 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사장님의 도움으로 무사히 하산하는데 성공했다. 통제구간을 모두 통과하고 밤티재로 내려선 것이 오후 2시 45분. 문장대에서 여기까지 2시간 15분이 걸렸다. 오! 기적이어라! 혼자서 이 곳을 지나려 했을 때 나는 예상시간을 4시간으로 잡아두고 있었다. 사장님의 가이드와 가벼운 배낭 덕분에 예상시간을 반이나 줄일 수 있었다.
무사히 밤티재로 내려서자 사장님이 말씀하셨다.
"여기서 늘재까지는 금방이니까
저는 트럭 몰고 늘재로 갈게요.
선유씨는 대간 타고 늘재로 와요.
거기서 배낭 찾아 종주 이어가세요."
라고 하신다.
"아니에요~
여기까지 도와주신 것만 해도 너무나 감사해요.
사장님 일정도 있으실텐데 진짜 괜찮아요."
하지만 사장님은 여기나 거기나 본인 입장에선 똑같다며 극구 늘재에서 다시 만나자 하신다. 처음부터 늘재까지 도와주려 했다고 하시면서. 나는 머뭇거리다가 알겠다고 대답한다.
사장님은 밤티재에서 늘재까지는 길이 매우 완만하지만, 고갯마루에 올라서서 별 생각없이 등산로만 따라가다보면 영 엉뚱한 곳으로 내려서게 된다고 하셨다. 백두대간 등산로가 아닌 백악산으로 이어지는 등산로가 더욱 선명해서 대간꾼들 열에 아홉은 엉뚱한 길로 빠진다며 나에게 등산로를 설명해 주신다.
하지만 이정표도 없는 곳을 설명하기가 쉽지 않았다. 사장님은 몇번이나 단어를 바꿔가며 내게 길을 설명하시더니
"그냥 같이 갑시다.
갈림길까지만 안내해 드릴게요."
하고는 성큼성큼 등산로로 올라가셨다. 밤티재에서 30분쯤 올라온 곳에서 사장님은 내게 백두대간 등산로를 알려주시고 다시 밤티재로 내려가시고, 이때부터 나는 홀로 늘재까지 이동했다.
3km 떨어진 늘재까지는 한시간 반의 시간이 걸렸다. 그 중 30분을 사장님의 가이드로 오른 것이다. 사장님은 트럭을 몰고 늘재에 도착하여 내가 내려올 때까지 아무 할 일 없이 차 안에서 시간을 보내셔야 했다. 아! 이 감사함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사장님께 꼭 보답을 해드리고 싶었다.
늘재에서 다시 만난 사장님은 트럭에서 잠시 눈을 붙이고 잠을 이루신 것 같았다. 역시, 사장님도 나 때문에 피곤하셨던 거야.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오늘은 어디서 비박할 거에요?"
"오늘은 이만 서울로 돌아가야 할 것 같아요. 내일도 비 예보가 있고, 어제 오늘같은 날씨가 내일도 모레도 이어질 것 같아요. 서울로 돌아갔다가 비 예보 해제되면 다시 내려와야 겠어요."
"잘 됐네요!
여기 바로 앞에 서울 가는 시외버스가 서요.
타세요. 서울행 버스 승차장에 내려드릴게요."
나는 사장님께 가이드비용이든 택시비든 뭐든 드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돈 없는 백수라 얼마 되지 않는 현금을 작게 접어 사장님께 드렸더니 한사코 사양하신다. 이러면 내가 이상한 사람이 되는 거라면서 끝까지 받지 않으셨다. 사장님은 서울행 버스가 정차한다는 승차장에 나를 내려주고 쌩 하니 가버리셨다.
이럴수가... 감사의 마음을 제대로 전하지도 못하고 음료수 하나 사드리지 못했다. 사장님은 진정 날개없는 천사인 모양이다. 어젯밤부터 술과 안주와 백두대간 이야기를 나눠주시더니, 오늘은 등산로 가이드를 해주시고 무거운 나의 배낭을 트럭으로 옮겨주신 것도 모자라 터미널까지 친히 데려다 주셨다. 사장님이 나를 위해 사용한 시간만 6시간이 넘었다. 차를 몰고 왔다갔다 한 시간까지 합친다면 7시간이 훌쩍 넘을 것이다.
사장님 뿐만이 아니었다. 사모님은 어젯밤 이야기를 나누는 나와 사장님을 위해 안주와 막걸리를 내어오시고, 오늘 아침에는 나의 대간종주 시간에 맞추어 새벽부터 아침밥을 차려주셨으며, 돈도 받지 않고 점심 도시락까지 챙겨주셨다. 통제구간을 여자 혼자 넘는 것은 위험하다며 사장님께 가이드를 요청한 것도 사모님이었다.
세상에... 어쩜 이렇게 따뜻한 사람들이 있을 수 있을까. 엄연히 숙박과 식사로 장사를 하시는 분들인데 돈을 받지 않고 이것 저것 다 내어주신다. 살면서 이런 천사들은 처음 만나 보았다. 행운의 여신이 나에게 사장님부부를 보내 준 모양이다. 피앗재에 천둥과 폭우를 뿌려 나를 사장님 댁으로 들여보낸 모양이다.
너무나 감사했던 나는
대간 종주를 마무리하고
그 해 가을, 그리고 다음 해 봄에
피앗재 산장을 다시 방문했다.
멀리 살아 자주 못 보는 친구들을 피앗재 산장으로 불러모았다. 그리고 산장으로 내려가기 전 이번엔 내가 안주를 만들어서 내려갔다. 사장님 사모님께 드릴 옷도 한 벌씩 준비해서. 사장님과 사모님은 마치 친정 부모님처럼 나를 반겨주셨다. 사모님은 상다리가 휘어지게 밥상을 차려주셨고 사장님은 숯불에 시골돼지를 직화로 구워주셨다.
나와 친구는 사모님과 함께 아랫목에 앉아 드라마를 보고 수다를 떨고 하나의 이불을 덮고 함께 잠이 들었다. 나에게 새로운 가족이 생긴 기분이었다.
< 오늘의 백두대간 >
고산자 지도/ 남쪽에서 북쪽방향으로
총 24구간 중
8구간
진행 구간 : 신선대(충북 보은과 경북 상주의 경계)-문수봉-문장대-밤티재-늘재(경북 상주시)
진행 날짜 : 2012년 5월 30일 / 수요일
월화수목금 주5일 연재됩니다~^^
파란동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