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날씨 때문에 늘재에서 종주를 마무리했는데 그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동서울터미널에서 늘재까지 한번에 가는 버스가 있었던 것이다. 종주를 마무리 한 날은 서울행 버스가 끊긴 바람에 상주에서 청주로 갔다가 환승해서 서울로 돌아왔고, 다시 종주를 이어 간 날은 동서울터미널에서 늘재로 바로 왔다.
정확히는 늘재행 버스가 아니고 화북행 버스다. 경북 상주시 화북면에 닿는 버스인데, 화북에 도착하기 직전에 늘재를 지난다. 화북행 버스는 직행이 아닌 완행으로 동서울터미널을 출발하여 충북 청주에서 30분간 정차하고 괴산군 청천면에서 10분간 정차한다. 그리고 종착지인 경북 상주시 화북면에 도착하는 것이다. 화북 정류소에서 늘재까지는 4km 정도의 거리라서, 걸어 가면 한시간이 걸리지만 차로 이동하면 5분 남짓 걸리는 지척이었다.
주말동안 집에서 쉬고 월요일 아침 배낭을 메어 다시 집을 나섰다. 이번에 가면 확실히 종주를 마무리하고 돌아와야지. 열흘만 더 이어가면 종주를 완주할 수 있을 것 같다. 열흘 일정의 첫날이라 배낭이 꽤 묵직했지만 물통이 텅텅 비어 배낭에 깔려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 앞으로의 대간 경로에는 물 수급할 곳이 많아서 낮동안 걸으면서 마실 물만 있으면 충분했다.
동서울터미널에서 함께 버스를 탄 열 명 남짓의 사람들은 모두 청주에서 내리고, 청주터미널에서 새로운 승객들이 올라탔다. 그 중 버스 통로를 중심으로 내 옆에 앉은 아저씨가 나의 배낭을 보고는 이것저것 물으신다. 자신도 예전에 백두대간 종주를 했었다며, 오늘은 문경과 상주의 경계에 있는 '도장산' 으로 산행을 나서는 길이라고 하셨다. 아저씨는 청천 터미널에서 내리시며 배즙 2봉지를 주셨다. 멋진 종주를 하라고 응원까지 해주신다.
버스가 화북 정류소에 닿기 전 늘재에 가까워질 즈음, 버스 기사님께 늘재에서 내려주실 수 있는지 정중히 여쭈었다. 기사님은 된다 안된다 대답도 없으시더니 늘재에 닿자 속도를 늦춰 버스를 세워주셨다. 버스에서 내리며 큰 소리로 "감사합니다" 인사를 드렸더니 그제야 미소를 지으시며 고개를 끄덕이신다.
배낭을 제대로 메고 시계를 보니 오전 11시 정각. 청화산 정상에서 점심을 먹기로 하고 산을 오른다. 오늘 나는 청화산과 조항산을 지나 고모치샘에서 물을 수급하고 이후로 비박지를 알아볼 예정이다. 고모치를 지나면 내일은 대야산과 장성봉 악희봉을 지나 은티고개에서 물을 수급하여 역시 비박을 할 것이다.
내일 지나게 될 대야산과 장성봉 악희봉은 백두대간 구간 중에서도 힘들다고 소문이 자자한 곳이었다. 계속해서 암릉이 이어지는 구간인데 암릉 옆을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로프를 잡고 넘어서야 하는 구간이다. 로프 없이는 절대 통과할 수 없는 곳이 줄기차게 이어지는데 문제는 암릉이 90도 직벽이라고 했다.
일시종주를 하는 사람들도 이 구간만큼은 하루씩 끊어서 당일배낭을 메고 통과한다고 했다. 피앗재 산장 사장님도 나에게 그렇게 할 것을 권하셨다. 하지만 나는 당일 배낭을 메고 서울을 왔다갔다 해야 할 것이 귀찮았다. 당일 배낭을 메고 매일 민박을 찾자니 그것도 거리가 나오지 않았다. 백두대간 남쪽구간처럼 툭하면 국도와 마을을 만나던 코스가 아닌 것이다.
일단 나는 열흘치의 누룽지를 챙겨 출발했다. 4일차와 8일차에 민박을 하고 나머지는 쭉 비박으로 이어갈 예정이었다. 열흘 후면 나는 소백산 비로봉에 있을 것이다.
10일 일정의 무거운 배낭을 메고 천천히 오르고 있는데 뒤에서 아저씨 한분이 빠른 속도로 올라오신다. 올라오면서 뭐라고 계속 말을 건다. 나는 얼핏 뒤를 돌아보며 "안녕하세요" 인사를 하고 계속 가던 길을 갔다. 그런데 아저씨가 계속 뭐라뭐라 말을 한다.
"네? 뭐라고요?"
그제야 제대로 돌아봤더니, 그 아저씨는 아까 늘재로 오던 버스에서 내 옆자리에 앉았던 아저씨였다. 통로 옆자리에 앉아 예전에 백두대간을 했다던 그 아저씨, 청천에서 내리며 나에게 배즙을 주셨던 그 아저씨 말이다.
"어?
아까 그 아저씨!
어떻게 된 거에요?
왜 여기에 계신 거에요?"
아저씨는 도장산을 오르려던 계획을 바꾸어 나를 따라 오셨다고 했다. 나를 보니 갑자기 백두대간을 다시 뛰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내가 버스를 타고 30분이나 더 들어왔는데 어떻게 이렇게 금방 따라오셨냐 어쭈니, 중간에 히치하이킹을 하셨단다.
한발 한발 천천히 올라가는 내게 아저씨는 배낭을 바꿔서 메어 주겠다고 하신다. 괜찮다고 했더니 자기도 괜찮단다. 이런 박배낭을 메어 본 것이 언제인지, 대간 타던 느낌을 다시 느껴보고 싶다고 하셨다. 몇 번 거절 하다가 박배낭을 내려놓았다. 아저씨는 나의 배낭을 메어 보시더니 무게는 많이 나가도 짐을 잘 싸서 안정감이 있다며 칭찬해 주셨다. ㅎㅎ
나는 20kg이 넘는 박배낭을 내어주고 5kg도 안 될 것 같은 작은 배낭을 넘겨받았다. 어깨가 가벼우니 이 오르막이 엄청나게 수월하게 느껴진다.
오르다보니 등산로에 쌀이 흩어진 것이 보였다. 흩어진 쌀 끝에는 '정국 기원단' 이라는 것이 있었다. 나라가 태평하길 기도 드리는 재단인 모양이다. '정국 기원단' 비석 양 옆으로 향을 피울 수 있는 단지도 설치되어 있었다.
지리산이나 태백산 설악산처럼 유명한 산도 아닌데 재단이 있는 것이 신기했다. 나라가 태평하길 기도 하기 위해 이 곳에 재단을 마련한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일까? 주변에 안내표지판이 없으니 알 길이 없다. 최근에 누군가 이 곳에서 기도를 드린 모양이다. 쌀이 제법 흩어져 있었다. 신기한 건 쌀 옆으로 참치캔도 두 개 있었다. 누가 놔두고 간 것인지 버리고 간 것인지.
"이거 챙겨 갈래요?"
참치캔을 가리키며 아저씨가 물으셨다. 배가 고플 때 만났다면 주저없이 챙겨갔을 것이지만 오늘은 열흘 일정의 첫 날, 먹을 것으로 배낭이 꽉 찬 날이다.
"아니요. 배낭이 너무 무거워서요.
이런 거에 욕심 부리면 안돼요."
정국 기원단 이후로 오르막이 더욱 가팔라진다. 바위 사이로 로프를 잡고 올라가는 길이 나타났다. 곧 도착할 청화산 정상을 기점으로 경북 상주가 끝나고 문경이 시작되는데, 문경과 함께 바위를 오르내리는 특전사 지옥훈련이 시작된다.
그런데 청화산 정상에 도착하기도 전에 벌써부터 바위와 로프가 나타나는 건 뭐지? 아직 대야산도 아닌데 왜 로프가 나타나? 잔뜩 긴장한 마음에 작은 암릉만 나타나도 쫄보가 되어버린다. 그나마 배낭이 가벼워 다행이었다. 아저씨가 아니었다면 첫 날부터 진땀 꽤나 흘려야 했으리라.
청화산 정상에 도착해서 아저씨와 함께 점심을 먹는다. 아저씨는 내게 힘들어도 김치 종류는 챙겨다니라고 말씀 하셨다. 염분을 섭취해야 힘을 낼 수 있는 거라면서. 특히나 땀을 쭉쭉 흘리는 지금같은 계절엔 염분섭취가 필수라고 하셨다. 하지만 나는 지금같은 계절이라 김치를 챙겨다니는 게 더욱 힘들다고 대답한다. 반나절도 안되어 김치가 쉬어 버리는데 무슨 수로 열흘씩 챙겨 다니나요? 아저씨 역시 나의 말에 동의하신다.
아저씨는 나의 사진을 찍어주셨다. 혼자 등산을 다니면 내 사진 한장 건지는 것이 생각보다 어렵다. 특히나 우중 산행을 하면 풍경 사진도 건지기 힘들고, 그것이 습관이 되다보면 사람을 만나도 사진 찍어달라는 요청을 깜빡하게 된다. 게다가 국립공원이 아닌 대간길에서는 만나는 사람들은 다들 다음코스로 이동하기 바빠 감히 사진을 부탁할 분위기도 아니었다.
점심을 먹고 다시 길을 이어간다. 청화산에서 조항산으로 향하는 길은 갓바위재까지 내리막이 이어지다가 다시 오르막을 치고 올라야 하는 길이다. 내려가는 길 곳곳에 탁 트인 조망지가 있어서 무척이나 기분이 좋았다. 비 온 뒤의 백두대간은 맑고도 깨끗했다. 아저씨도 박배낭을 메고 이런 풍경을 맞이하니 진짜 대간 타는 느낌이라며 연신 웃으셨다.
3시간 만에 조항산 정상에 도착하여 잠시 쉬다가 40분 후 고모치에 도착했다. 이제는 진짜 깊은 여름이다. 날씨도 그렇지만 숲을 이루는 초록이 절정을 이루고 있다. 지난번 대간길에서도 여름같다 싶었지만, 며칠간 비를 듬뿍 머금은 산은 초록빛도 더욱 깊어져 있었다.
고모치 바로 아래에 있는 고모샘에서 아저씨와 나란히 물통을 채웠다. 나는 비박을 해야 해서 모든 물통을 가득 가득 채웠고, 아저씨는 500ml 한병만 채우셨다. 샘에서 물을 채운 우리는 고모치로 돌아와 작별인사를 나눴다.
"오늘 산행 즐거웠어요.
남은 대간도 오늘처럼 즐겁게 이어가도록 해요."
"감사합니다.
오늘 배낭 들어주셔서 더 감사해요.
덕분에 편하게 왔어요. 조심히 내려가세요~"
아저씨는 고모치의 서쪽 안부로 뛰어 내렸다. 지도에 등산로 표시도 없고 쓰러진 나무로 가로막힌 길인데 그쪽으로 내려 선 것이다.
깜짝 놀란 내가 거기로 가면 안되지 않냐 여쭈니, 잘 아는 길이라며 걱정하지 말라고 하신다. 그리고는 바람처럼 사라지셨다. 그때가 5시 였으니 해가 지기 전에 마을에 닿으려면 서둘러야 하셨을 것이다.
< 오늘의 백두대간 >
고산자 지도/ 남쪽에서 북쪽방향으로
총 24구간 중
9구간
진행 구간 : 늘재(경북 상주시)-청화산-갓바위재-조항산-고모치-고모샘(충북 괴산과 경북 문경의 경계)
진행 날짜 : 2012년 6월 4일 / 월요일
월화수목금 주5일 연재됩니다~^^
주말동안 마음껏 행복하시고
월요일에 다시 만나요!
파란동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