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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기차여행, 제대로 즐기는 법

늦깎이 내일로 여행자의 기차여행 예찬

by Sunyoung Choi


문득 도시의 일상이 지겨워질 때쯤이면 무작정 백팩을 메고 서울역으로 향한다. 자판기에서 1,500원짜리 캡슐 아메리카노를 뽑아 부산행 기차에 몸을 싣는다. 훌쩍, 기차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이번 여행의 일등공신은 내일로 여행 티켓이다. 지하철역 어딘가, 우연히 시선이 닿은 곳에 “내일로 여행 2.0” 홍보 포스터가 붙어 있었던 것이다.


내일로 여행은 오랜 꿈이었다. 그토록 좋아하는 기차에 내키는 대로 몸을 싣고 전국을 유랑할 수 있다니!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학부생 시절엔 기회가 닿지 않아 놓쳤던 기회를 서른이 넘은 지금에서야 잡게 된 것이다.


쾰른 중앙 기차역. 기차역은 마음을 설레게 한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기차여행의 매력에는 무엇이 있나요,라고 물으신다면 아마 한참 동안 아무 대답도 들으실 수가 없을 것이다. 기차여행의 매력은 말 그대로 무궁무진하기 때문에, 한 가지만을 꼽을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 글을 쓰는 이 순간도 수많은 풍경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첫 번째로 차창 밖에 실시간으로 펼쳐지는 아름다운 산수화 감상이 있겠다. 한국은 유난히 산이 예쁜 나라다. 기차 차창 너머로 녹색의 강줄기와 어우러진 고운 산맥을 보고 있자면 그 소박한 미학에 눈길을 빼앗기게 된다.


거칠고 장엄한 알프스의 흰 눈으로 덮인 산맥이나, 진득한 야생의 녹음을 품고 있는 대만 북부 진과스(金瓜石)의 풍경과는 사뭇 다른, 한복 옷소매 자락 같은 고움을 감추고 있다.


두 번째 매력 포인트는 나만의 플레이리스트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친숙했던 아날로그 카세트 플레이어는 스트리밍 서비스로 진화하고, 무선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는 편리한 시대이지만 “무엇인가를 듣는 행위”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차창 밖 풍경과 어우러지는 음악은 그 자체로 나만의 영화가 된다.


영원한 백조의 성, 노이슈반슈타인 성(Das Schloss Neuschwanstein)



기차는 글 쓰는 사람에 있어서 고마운 존재다. 창밖을 멍하니 보다가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자판을 타닥타닥, 두드리기 시작한다. 정적으로 흐르는 초록색 모노톤의 풍경에는 글 한편을 뚝딱 완성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마법이 숨어 있다.


마지막으로, 기차여행은 저탄소 라이프를 실천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좋은 여행수단이기도 하다. 기차는 탄소배출량이 비행기에 비해 배 가까이 적다고 알려져 있다. 오래된 여행자로서 그동안 알게 모르게 지구별에 부담을 준 죄책감을 조금이나마 덜고 가벼운 마음으로 여행을 즐길 수 있다.


기차를 타고 글을 쓰고 있는 바로 이 순간에도, 기차여행에 얽힌 추억들이 생생하게 눈앞에 떠오른다.

레닌그라드 주의 푸르른 정원이 있는 마을, 가치나로 향하던 러시아의 붉은 기차에서 차창에 머리를 기대고 하염없이 바깥을 바라보던 어느 여름날과, 바이에른의 백조의 성으로 가는 길에 마주친 이 세상 풍경이 아닌 것 같은 눈이 시릴 정도로 아름다운 눈밭.


기차여행은 추억을 낳고, 여행자는 평생 그 추억에 담긴 아름다움을 양분으로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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