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떠돌며 “화장 덜 하는 법”을 깨닫다
어릴 적 캐나다에서 살았던 동네는 유럽계 백인 주민들이 많았다. 동네에서 처음 사귄 나보다 한 학년 아래인 친구 A는 새하얀 피부에 새파란 눈을 가진 앳된 소녀였다. 핑크 립스틱에 푸른 아이 섀도가 꽤나 멋지게 어울렸던.
“흠…”
온갖 밴드와 연예인의 포스터들이 벽면에 어지러운 그녀의 방에서 생전 처음 메이크업이란 걸 받을 때, 그녀는 아주 미묘한 한숨 같은 걸 쉬었고 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왜, 뭐가 잘못됐어?”
“아니, 아니야. 아주 예뻐.”
그녀는 재빠르게 내 눈에 아이섀도를 정성껏 바르던 브러시를 치우고 입술에 빨간 립스틱을 톡톡, 칠해주었다. 그리고 거울을 보고 깨달았다. 그녀가 애용하는 파란 섀도가 내 맨질한 동양인의 눈꺼풀과 짙은 갈색 눈동자에 잘 어울리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란 걸.
다행히도, 친절한 A의 금발머리 새어머니는 “아, 정말 사랑스럽구나!”를 연발해주어 내 기분은 한층 나아질 수 있었다.
여하튼, 내 첫 화장의 기억은 이렇다.
여행을 다니면서 화장을 안 하고 다닌 적은 거의 없다. 혹자는 진정한 미니멀리스트라면, 혹은 진정한 배낭여행자라면 화장을 안 하는 것이 미덕 아닌가요라고 물으실 수도 있겠다. 맞는 말이다. 그렇지만 여행 다니면서 “사진 찍히기”를 사진 찍기와 거의 비등하게 좋아하는 나로서는 화장을 포기하기가 좀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다.
좋아하는 에세이스트이자 닥종이 인형가인 김영희 작가의 수필집에서 다른 건 몰라도 눈 화장만큼은 꼭 하지요, 라는 구절을 읽은 기억이 난다. “눈 화장만 하는 여자”라는 작가의 자전적 에세이집 제목으로 쓰일 정도다. 독일에 아이 셋을 데리고 건너가 민들레처럼 뿌리를 내렸던 그녀. 그녀에게 있어서 짙은 아이라인은 낯선 유럽 땅에 홀로 선 한국인의 자존심과도 같은 존재였을까.
어린 나에게 있어서도 화장은 갑옷이나 마찬가지였다. 얼굴에 짙은 색의 화장품으로 그림을 그리지 않으면, 어쩐지 이 드넓은 외국 땅에 순하디 순한 눈매로 나 홀로 있다는 사실을 확인사살당하는 것 같았다. 상처받은 여린 마음은 그만큼 커져가는 화장품 꾸러미와 비례했다.
그랬던 여린 소녀가 씩씩한 여행자가 되면서 변화가 찾아왔다. 화장품 파우치는 손바닥만 한 크기를 넘지 않는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아침이 되면 선크림을 바르고, 눈 화장은 아이라이너와 마스카라. 그리고 입술을 칠하고는 끝이다. 더 이상 단단한 갑옷은 필요치 않은가 보다.
평생 근검절약을 미덕으로 살아온 어머니는 립스틱을 사다 드리겠다는 내 제안에 늘 “아니, 하나 있는데 뭐. 이거면 충분해.”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시곤 했다.
이거면 됐어, 이거면 충분하다는 마음가짐으로 살기. 단단해진 여행자의 마음은 치장해서 꽁꽁 싸매 놓을 필요도, 산더미만 한 메이크업 박스를 짊어지고 다니며 땀을 뺄 필요도 없는 것이다. 여행하는 삶에는 끊임없는 덜어내기가 필요한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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