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자의 제주 여행기 : 협재 해변에 부서지는 햇살을 맞으며
제주행을 결정하기까진 여러 가지 우여곡절이 있었다.
첫 번째, 퇴사를 결심했다. 몇 년이나 다니던 직장을 떠나기는 역시 쉬운 일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나를 보며 배시시 웃던 꼬마 환자들이 눈에 밟혔다. 선천성 희귀 유전성 대사질환을 갖고 태어나, 갓난아기였을 때부터 병원을 들락거리던 J는 이젠 고사리 같은 손으로 콜라를 원샷하며 제법 만족스럽다는 듯이 미소를 지을 수 있을 만큼 컸다. 다음번에 병원에 오면 그 아이들, 한 번쯤은 궁금해하려나.
두 번째로는 이사였다. 퇴사에 따른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이사는 나를 미니멀리스트로 만든다. 사실 이사는 캐나다 유학생 시절부터 신물이 날 정도로 해왔다. 나에게 쓸데없는 물건이 이렇게나 많았다니. 쓰레기봉투를 몇 개나 비워내면서, 이번에도 다짐한다. 물건의 노예가 되지 않겠노라고.
그리하여, 나는 지금 따뜻한 제주의 협재 해변가 어느 밀짚 파라솔 밑에 고양이처럼 몸을 웅크리고 앉아있는 것이다.
새파란 하늘엔 구름이 동동 떠다니고, 귀에 꽂힌 에어 팟에는 2017년 유로비전 포르투갈 우승자인 살바도르 소브랄(Salvador Sobral)의 “바다 가까이에(Cerca del mar)”가 무심히 연주되고 있다. 잠시 포르투갈 호카 곶의 가파른 해안가와 서글프게 뉘엿뉘엿 지던 석양이 머릿속을 스친다.
제주도에서 가장 좋아하는 해변을 꼽으라면 당연 협재 해변을 꼽는다. 에메랄드 물감을 그대로 풀어놓은 듯한 맑은 바다 색깔은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맑아진다. 그림같이 펼쳐진 푸른 비양도는 화룡정점이다. 조개껍질이 섞인 은모래 빛 백사장은 말해 무엇하랴.
이곳을 찾은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제주도에서만 파는 특별 메뉴를 맛보기 위해 스타벅스를 들러 제주 쑥떡 프라푸치노를 먹고 온 터였다. 고소한 쑥 냄새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여유를 만끽하며 책을 읽겠다는 포부는 5월의 생뚱맞은 에어컨 바람 폭격으로 인해 무너지고 말았다. 이를 딱딱 부딪치며 피신한 해변가에서, 근사한 파라솔 밑에 자리를 잡고 털썩 앉아 글을 써 내려가기 시작한다.
5월의 제주는 완벽하다. 적당히 따뜻한 날씨와 쨍한 햇살, 청량한 공기와 돌담 밑 곳곳에 피어있는 들꽃까지. 좋아하는 파스텔톤 수국이 지천인 정원은 천국과도 같았다.
이제 비양도를 기점으로 흐려지고 있는 하늘엔 해가 저물어가고 있다. 살짝 쌀쌀해진 바람이 시리다. 저녁은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지도를 뒤적거리다 이내 그만둔다. 하루쯤 맛집을 들르지 않아도 어떠랴. 오늘은 예쁜 협재의 풍경을 마음껏 맛보았으니 그걸로 되었다.
이렇게, 퇴사자의 제주 여행 하루가 저물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