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여행 D-day
'방탕한 12월을 보냈다'라고 썼다. 바로 방탕의 정확한 뜻이 궁금해졌다.
방탕 (放蕩)
[명사]
1. 주색잡기에 빠져 행실이 좋지 못함.
2. 마음이 들떠 갈피를 잡을 수 없음.
2번에 가까우나, 마음이 들뜨기보단 심하게 가라앉은 상태였다. 무얼 해도 흥이 나지 않았고 쉬 지쳤다. "지금 이렇게 그만두면 다시 돌아오기 힘들어. 너무 아깝다." 선배의 조언을 흘려들으며 사표 쓰던 날이 생각났다.
"선배, 나는 돌아올 마음이 없어요. 앞으로 내 삶에서 다시 회사원이 되는 일은 없을 거야. 그러니까 괜찮아. 정히 취직이 필요하면 내가 나를 고용하지 뭐."
서른일곱이었다. 하여 용감했다. 2021년 12월, 40대의 나는 길을 잃은 느낌이었다. 무얼 하며 살아야 할지, 무슨 일을 하며 밥벌이를 해 나갈지 자신도 없고 용기도 없고 심지어 의욕까지 상실했다.
한 달 내내 최소한의 집안일만 하며 한량처럼 굴었다. 영화 보고, 드라마 보고, 웹툰 보고... 그러다 지겨우면 잠들기 직전 Duolingo앱을 열어 일본어 공부를 했다. 수업 마치고 돌아온 아이를 꾀어 치킨과 피자로 저녁을 때우고 미드 시리즈나 일드 시리즈 등등을 함께 정주행 하며 자정이 가까워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제주도 숙소 예약을 완료한 후에도 남편에게 종종 "가지 말까? 제주도?" 묻곤 했다.
제주여행 D-2, 아이의 수영복이 작아졌단 사실이 떠올랐다. 부랴부랴 온라인 쇼핑 시작. 허나 출발 전 배송되지 않을 확률이 51%였다. 결국 수영복이며 책(심지어 제주여행 여행서), 아이 문제집 등의 배송지를 제주집으로 변경했다. 운이 좋으면 처음 가는 집 대문 앞에 나를 찾는 택배 상자가 쌓여있을지도.
늘 머물던 한경면이 아니라 이번엔 정반대 구좌읍이다. 더는 급할 때 뛰어갈 (이를테면, 나 대일밴드 좀~~~ 소독약 좀~~~ 숟가락 좀~~~) 건이네도, 출근하다시피 했던 유람위드북스도, 하루 걸러 하루 튀김과 떡볶이와 복숭아 에이드를 사 먹던 밀크홀도 없다. 구좌읍은 내게 낯설고 낯선 제주다.
건들건들 세상 삐딱한 마음 상태 때문일까? 낯선 동네에 대한 설렘임과 기대가 익숙한 편안함에 밀리고 있다. 출발 하루 전날 치킨을 반찬삼아 저녁을 먹으며 아이에게 말했다. "엄마, 제주에 가면 달라질 거야." 말도 안 되는 말이라는 건 아이도 알겠지. 제주에 간다고 해서 게으름이 바다 저 깊은 곳으로 사라지고, 가라앉던 마음이 파도처럼 펄떡이며 생기를 얻을까?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이른 아침 잠을 깬 떠나는 날 새벽.
이제 구글 드라이브에 저장해 둔 엑셀 파일을 열거다. 1년 전 약 7주간 제주에 일하러 떠나며 공들여 작성했던 바로 그 목록이다. (해당 파일을 구글 드라이브에 보관해 둔 스스로를 칭찬한다.) 목록에 있는 물품들을 모두 거실에 늘어놓은 후, 함께 담을 물품들끼리 그룹핑해야지. 그렇게 짝지은 물건들은 가방이나 상자에 담은 후 아귀가 딱 딱 맞게 트렁크에 실으면 떠날 준비 끝~~
현재 시각 새벽 3시 59분. 과연 나의 짐 싸기는 몇 시간 짜리인가? 나는 오늘 몇 시에나 떠날 수 있을 것인가? 과연 떠나긴 떠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