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치는 바닷가에서 모래성 쌓기
대학 동문이자, 오랜 친구인 란이네 부부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다. 늘 그렇듯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하소연인 듯, 고자질인 듯 각자의 배우자에 대한 은근한 불평불만이 터져 나왔다. 이런 자리가 반가운 건, 내 남편이 아닌 남의 남편의 의견도 들어볼 수 있다는 것. 내 아내가 아닌 남의 아내의 생각도 알게 된다는 것. 의외로 이런 대화는 꽤 도움이 된다. 가족만 있는 자리가 아니다 보니 말하는 사람도 말을 듣는 사람도 '체면'이라는 것을 갖추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버럭'하기보단 경청하게 되더라.
남편의 불만은 자동차였다. 나만 타고나면 차가 엉망이라는 하소연이다. 인정. 차에 한해선 깔끔한 남편의 불만을 어느 정도는 이해한다. 하지만 나도 할 말은 있다. 남편은 주로 차를 혼자 타지만, 대부분의 경우 나는 아이와 함께 탄다. 아이가 과자나 빵 등을 차에서 먹을 때마다 조심하라 이르긴 하지만 "흘리는 걸 어쩔 것이며, 흐르는 걸 또 어쩐단 말야"가 나의 입장.
"주차하고 난 후 차를 한 번만 살펴보면..." 나의 당당한 태도를 받아들이기 어려운지 남편이 다시 한번 미련을 표시했다.
"쮸가 어렸을 땐 정말 그럴 정신이 없었어. 애 데리고 빨리 (집으로) 올라가서 씻기고 먹이고 재워야 해서 마음이 늘 바빴지. 애가 좀 크면 나아지려나 했는데, 여전히 늘 바빠. 애 어릴 때 어딘가로 가출한 정신이 아직도 안 돌아온 기분이야."
변명 아닌 변명을 하며 내가 흐흐흐 웃었다.
그렇게 시작된 청소와 정리정돈에 대한 이야기들은 "아이가 있는 집은 정리가 참 쉽지 않은 것 같아"라는 동이 선배(란의 남편)의 경험담으로 이어졌고 이사온지 3년째, 여전히 정리 중인 우리집 이야기로 연결되었다. 본인 옷장과 본인 물건에 한해서 정리를 꽤 잘하는 남편이 한결같이 어수선한, 언제나 정리 중인 우리집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데 란이가 이런 말을 했다.
"오빠, 집안일이라는 건 말야 파도치는 바닷가에서 모래성을 쌓는 것 같아. 아무리 열심히 모래성을 쌓아도 한 순간 파도가 들이치며 순식간에 무너져버려. 그럼 다시 쌓아야지. 그런데 또 무너져. 쌓고 무너지고 쌓고 무너지고. 그런 일을 몇 년씩 매일 반복하다 보면 무력감에 빠지거든. 그래서 주부가 참 힘들어. 무너질 걸 뻔히 알면서 같은 일을 하고 또 해야만 하니까."
세상에 어쩜 이렇게 찰떡같은 표현을 찾아냈느냐며 물개 박수를 쳤지만 순간 마음이 울컥해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란이의 이야기에 마음이 흔들린 것이 나뿐은 아닌지, 요 며칠 쮸도 남편도 집안일에 적극적이다.
오늘도 나는 모래성을 쌓는다. 어제한 분리수거를 오늘도 하고, 어제한 새벽 배송 식재료 정리를 오늘 새벽에도 한다. 그래도 란이 덕분에 매일 하던 일을 반복하며 이제는 바다를 떠올린다. 한 겨울에도 털모자 쓰고 털장갑 끼고 "추워, 추워"하면서도 바다 가길 좋아하는 나인지라, 집안일을 하며 바다가 떠오르는 이 순간이 꽤 신선하다.
모래성도 자꾸 쌓다 보면 무너지지 않는 노하우가 생기려나? 식기세척기를 들이면 내가 쌓는 모래성의 한 층 정도를 덜 쌓아도 되려나? 별별생각이 다 드는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