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를 헤아리는 한 시인의 마음
나의 상처가 타인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면죄부가 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상처 받지 않기 위해 타인에게 상처를 주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상처가 지워지지 않는다.
우리가 증오해야 할 대상은 상처 받은 사람도, 상처 받지 않은 사람도 아니다.
지금도 여전히 자신의 상처를 지우기 위해 타인을 벼랑 끝으로 내모는 자들이다.
(2011년, 신철규 시인의 신춘문예 당선 소감 중에서)
혐오가 들어간 모든 단어들을 나는 부정한다.
남성 혐오, 여성 혐오, 난민 혐오, 성소수자 혐오라는 단어들이 유난히 많이 보인다고 느꼈을 때, 마사 너스바움의 <혐오와 수치심>을 찾아 읽었다. 미국의 법철학 교수인 그녀는, 삶이란 불완전하고 불확실하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모두 개별적이고 불완전한 존재임을 인정하고, 개인의 잘못된 행동 혹은 비합리적인 사회 구조에 분노하되 특정 집단의 정체성을 겨냥하여 혐오하지 말라고 밝힌다. 나는 밑줄을 그으며 이 말에 동의했다.
그런데 신철규 시인의 마음은 더욱 깊다. 어쩌면 그 모든 혐오를 품은 사람들이야말로 애초에 가장 상처 받은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걸 헤아린다. 아무리 애써도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받았기에, 어쩌면 지금도 계속 상처를 받고 있기에 그 가해자들을 향한 혐오감에 더욱 날이 서 있는 걸지도 모른다고. 어느 누가 기꺼이 타인을 혐오하고 또 어느 누가 즐겁게 그걸 밖으로 내비치고 있겠는가. 다들 가시가 돋친 그 감정을 어쩔 수 없이 끌어 안은 채 울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는 다시 한번 시인의 당선 소감을 되새긴다. 나의 상처가 타인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면죄부가 되지는 않는다고. 나의 상처를 지우고자 타인을 벼랑 끝으로 내몰지는 않겠다고 다짐해본다. 상처를 상처로 되갚지 않고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줄 수 있는 이상향을 꿈꾼다. 어쩌면 현실적이지 않을지도 모를 시인의 순수한 마음이 아름답고 또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