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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의 Apr 12. 2020

어려운 책을 읽을 때 찾아오는 뜻밖의 설렘에 관하여

공부의 모자람을 깨닫게 하는 <타인의 자유>를 읽고


평소 자기 방을 돼지우리처럼 지저분하게 해놓고 사는 사람들도 시험 전날만 되면 그렇게 공부하기가 싫어서 방을 치우게 된다지. 인간의 변덕은 늘 얄궂게 작용하는 경향이 있기에 한창 공부해야 할 대학생 때는 그렇게 딴짓이 하고 싶더니 학점을 엉망진창으로 받아 겨우 졸업을 하고 나니 이제서야 공부가 하고 싶어진다.


나는 故황현산 교수님이 직접 제자들을 가르치던 강의실이 있는 건물에서 내키지 않아하며 중문과 전공 공부를 했다. 철없는 스무살에게는 인문학이든 문학이든 그 "쓸모 없음"이 무척이나 초라하게 느껴졌고, 직장을 다니는 때 꼭 필요해 보이는 마케팅과 회계, 재무 이론 수업과 팀플 활동들로 밤새는 경영학과 친구들이 늘 부러웠다. 막상 회사를 오 년쯤 다녔을 때 깨닫게 된 건 인문학이야말로 그 어떤 전공도 부럽지 않은 귀중한 전공이었다는 것, 그리고 나에게도 전공을 제대로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충분히 주어졌었지만 내가 잡지 못했다는 것이다. 어리석었던 스무살의 대학생 시절은 이미 한참 전에 지나갔다. 나는 故황현산 교수님의 수업에 더 이상 수강 신청을 할 수 없다. 교수님도 이제 없고, 스무살의 나도 더 이상 없다.


그러나 그때의 나보다 조금 더 많은 책을 읽은 서른 다섯살의 나는 지금 여기 있다. 그리고 故황현산 교수님이 남기고 가신 책들도 여기 있다. 그리고, 교수님의 절친이자 벗인 김인환 문학평론가의 신간, 타인의 자유도 여기에 있다.


김인환 문학 평론가는 황현산 교수님이 가르쳤던 대학에, 내가 한 때 학문을 경시하고 과외 활동에 매진했던 시절을 지나온 대학에 명예 교수로 계신 분이다. 김인환 교수님은 사실 이번 책을 통해 처음으로 알게 된 분이었다. 나는 황현산 교수님과 김인환 교수님의 우정에 대해 생각한다. 폭 넓게 뿌리내린 사유는 한 사람의 머리 속에서만 굳어지고 깊어진 것은 아닐 것이다. 분명 열띤 토론과 수정, 개발, 발전의 단계를 거쳤기에 참나무처럼 단단해질 수 있었을 것이다. 황현산 교수님의 사유는 일부 김인환 교수님께 기인하고, 김인환 교수님의 사유는 일부 황현산 교수님께 기인하고, 이런 상호 작용의 우정을 상상하다 보면 황현산 교수님의 저서를 닳도록 여러 번 읽었던 나로서는 김인환 교수님의 『타인의 자유』를 읽지 않을 수가 없다.


책을 읽는 건 예상했던 것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롤랑 바르트나 라캉의 번역문을 읽는 것과 같은 난해한 어려움은 아니었다. 문장은 분명하고 명쾌했다. 종종 이해하기 어렵다 느껴지는 건 사유의 깊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평생을 학문에 매진한 1946년생 교수님의 삶을 몽땅 들이부은 사유의 맥락을 내가 한 술에 따라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오히려 이상하다. 나는 천천히 읽고, 한 페이지 앞으로 돌아가 연필로 밑줄을 치며 다시 읽는다. 교수님의 생각을 이론 공부하듯이 받아들이고 외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사유의 생김새와 모양을 따라 그리면서 느리게 읽는다. 점선으로 그려진 밑바탕을 연필로 그려 나가듯이.


맥락의 궁극적 의미를 파악했다는 오만이나 맥락을 장악하고 고정시키겠다는 환상을 벗어나, 독자는 읽을 때마다 발견되는 관계들의 새로운 매듭들 가운데서 극히 적은 몫을 선택하고, 자기가 읽은 본문들이 교차되는 자리를 한정하여 그 책들을 관통하는 맥락의 줄거리를 구성해야 한다. 한 권의 책을 읽을 때 무의식적으로 개입하는, 그전에 읽은 책들의 간섭을 의식의 지평에 내놓아야 하는 것이다.

- 타인의 자유, p33


이해가 되면 다행이고, 이해가 안되면 또 그만이다. 그러나 모든 걸 이해했다고 여기는 건 오만이다. 저자의 말이 책의 띠지 문구와 교묘하게 연결이 된다.


공부의 모자람을 알게 하여 자유롭게 공부하게 만드는 책!
- 아랫배로 생각하는 우리 시대 인문학자 김인환의 산문



그래, 쉽게 읽히지 않은 책을 읽었을 때 가슴이 두근두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나의 모자람이 느껴져서 겸손하게 되고, 그래서 더욱 도전 의식이 불타오른다. 대학교를 졸업한 지 십년이 지났지만 아직 배워야 할 것이 넘친다. 내가 어제 읽은 책은 양분이 되어 오늘 읽을 책의 씨앗을 발아하게 하고 내일 읽을 책의 꽃을 피울 것이다. 오로지 책 뿐만이 아니더라도, 책과 학문, 취미와 자기 계발, 사회 생활과 여행을 통한 모든 공부들이 서로 무수한 관계들을 맺고 나를 깊어지게 한다.


감사한 일이다.


한 권의 책을 정밀하게 읽어서 그것의 밑바닥에 있는 의미를 해석하는 방법은 책의 다양한 의미를 제한하게 된다. 의미는 책의 밑에 있는 것이 아니라 책들이 다른 책들과 맺는 무수한 관계 안에 있는 것이다. 책들과 책들의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관계들의 결을 파악하려면 깊이의 비전 대신에 옆으로 보는 비전을 따라가야 한다.

- 타인의 자유, p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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