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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의 Apr 08. 2020

집 앞 도서관 놔두고 왜 또 책을 샀어

구매해서 읽어야 직성이 풀리는 책들에 관하여

퇴근길 회사에서 집까지는 버스를 타고 이동한다. 아파트 단지 바로 앞 횡단보도 한가운데 위치한 정류장에 버스가 선다. 내려서 왼쪽으로 건너가면 집이다. 오른쪽으로 건너가면 도서관이다. 이만하면 책을 사랑하는 나에게 더 이상 바랄 것 없는 주거 환경이 되겠다.


이처럼 엎어지면 코가 닿는 위치에 자리 잡은 도서관에는 내가 관심 있어하는 책 대부분이 '대출 가능' 상태로 진열되어 있다. 신간이 빨리 도착하는 도서관은 아니지만, 내가 평소에 읽고 싶어 검색하는 책들이 대부분 출간된 지 최소 일 년은 넘은 책들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나의 독서 취향이 그다지 대중적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다. 집 앞 도서관이 이사를 가거나 내가 이사를 가지 않는 이상, 나는 굳이 책을 살 필요가 없을 것이다.


아니다, 그렇지 않다. 나는 여전히 내 용돈의 상당 비중을 책을 구입하는데 지출하고 있다. 도서관을 다니며 부지런히 책을 빌리지만 그럼에도 어떤 책들은 꼭 직접 사서 나의 서재에 꽂아두어야지만 직성이 풀린다. 읽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고 꼭 소장을 해야만 하는 세 가지 종류의 책들에 대해 오늘은 이야기하고자 한다.




1. 세트미는 절대 포기할 수 없어


대표적인 예가 각 출판사 별 세계문학 전집이다. 나는 한 출판사의 전집을 통째로 사서 모으지는 않는다. 다만 그때그때 읽고 싶어 구매한 책이 쌓이다 보니 지금 민음사 세계문학만 책장 한 줄, 문학동네 세계문학이 책장 반 줄을 차지하고 있다. 예전에는 이유 없이 무조건 민음사로만 사들였는데 요새는 작품 하나를 들일 때마다 번역을 비교해보는 습관이 생겨 창비나 열린책들 책들도 몇 권 추가되었다. 문학동네에는 토니 모리슨이나 모니카 마론의 소설들처럼 다른 출판사에는 없는 작품들이 많아 요 몇 년 자꾸 새로 들이고 있다. 최근 출판사에서 자꾸 세계문학전집 리커버 판을 출시하고 있는데 (특히 문학동네, 을유문화사 리커버들 디자인 정말 아름답다) 나는 그놈의 세트미를 버릴 수 없어서 오리지널 버전을 고집하고 있다.


국내 소설 중에는 원래는 문학사상사의 이상문학상 전집을 모았다. 6년 동안 매년 초에 출간되자마자 사들였는데, 재작년부터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으로 교체했다. 결과적으로 참 잘한 일이었다 (올해 이상문학상 이슈가 터지고 나서 나는 집에 있는 전집들을 모조리 내다 버렸다...)


가장 갖고 싶은 세트는 솔출판사의 버지니아 울프 선집, 그리고 민음사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전집이다. 한꺼번에 사들이면 절대 읽지 않을 것 같아서 작년에 세트 충동구매 욕구를 꾹 누르고 민음사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권만 먼저 구입했다. 그 1권도 아직도 시작하지 않은걸 보면 역시 참기를 잘했다.




2. 줄을 긋지 않고선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 비문학 고전들



오기일까 허세일까. 벽돌책 읽는 걸 좋아한다. 물론 다 읽고 나면 뿌듯하게 인스타그램에 리뷰를 남기며 자랑까지 해야지만 만족스럽다. 나의 첫 벽돌책 『총균쇠』 를 완독한 이후부터 자신감이 생겨 『코스모스』, 『우주의 구조』, 『혐오와 수치심』, 『돈키호테』 , 『생각에 관한 생각』등의 책들을 신나게 읽었다.


문제는 욕심만큼 내가 똑똑하지 않다는 데 있다. 『우주의 구조』나 『혐오와 수치심』을 읽을 때는 내용이 머릿속에 잘 들어오지 않아 한참을 한 페이지에 머물러 있기도 했다. 끝내 이해하기를 포기하고 '언젠가 다시 읽어야지' 라며 미뤄두고 넘긴 대목들도 많았다. 낙서는 어쩔 수가 없는 선택이었다. 한 자루에 2,400원이나 하는 블랙윙 연필을 사서 부지런히 줄을 치고 단락을 표시하고 질문들을 써나갔다. 책에 쓴 메모의 대부분은 이런 식이다. '이 부분 도저히 이해 안 감. 두 번째 읽을 때 주의해서 다시 볼 것!'. 한 권을 세 달 이상 붙들고 있기도 했고, 언젠가 꼭 다시 읽겠다며 벼르고 있기도 하다. 그러니 도서관에서 빌릴 수는 없었다.



3.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 please take my money!



사실 내가 구매하는 책의 대부분은 이 세 번째 유형에 해당한다. 어떤 작가들은 그냥 너무 좋아서 응원하고 싶다. 내가 책을 빌리지 않고 사서 읽어야지만 그 돈이 아주 조금이라도 작가들에게 보탬이 되고 동기 부여가 돼서 그 작가들이 계속 집필 활동에 매진을 할 거고 더 많이 책을 내주면 나는 또 기쁘게 책을 사고 읽으면서 행복하겠지. 나는 그런 선순환 구조를 믿으며 국내 소설가, 시인들의 책은 웬만하면 사 모으는 편이다. (되려 해외 작가들의 작품은 그래서 빌려보는 경우도 많다.)


작년에 일간 이슬아 에세이집을 샀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이슬아 작가가 직접 차린 <혜엄출판사>가 존재하기 전, 알라딘이나 yes24에 들어오기 전에 무작정 독립서점을 찾아가 1쇄를 사들였다. 이슬아 작가가 지금만큼 인기를 얻기 전인데, 나는 일간 이슬아 메일링 서비스의 배짱 있는 홍보 문구 중에 이 문장이 너무 좋았다.


"아무도 안 청탁했지만 쓴다!"


글 쓰는 사람으로서 남이 만들어 놓은 기준이나 잣대를 따르지 않고 혼자 길을 개척해서 당당하게 쓰겠다는 작가가 나는 너무나도 멋졌고 사랑스러웠다.


요새 나는 윤이형 소설가의 소설집들을 간절한 마음들로 한 권씩 구입하고 있다. 부디 계속 글을 써주셨으면 하는 마음으로.






사람들은 여행을 가서 목격한 풍경들을 사진으로 남긴다. 이국적인 문화, 장엄한 건축물, 아름다운 자연을 마주했을 때 순간을 즐기지 않고 오로지 사진 찍는 데만 급급한다면 아쉽겠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하는 순간이 꼭 찾아오곤 했다. (평생 가장 행복하고 게을렀던 신혼여행 사진을 한 장도 찍지 않고 돌아온 사람이 바로 나다.) 그렇기에 나는 내 앞의 풍경을 최대한 눈으로도 새기고, 귀로도 담고, 냄새로도 인식하였다가 마지막으로는 사진을 찍어 기록을 남겨두는 것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래야지 후에 집에 돌아와서도 사진을 다시 한번 꺼내어 그때 그 여행의 순간들, 그 순간 속 감각들을 다시 방 안에서 펼쳐 보일 수가 있었다.


나에게는 책장이 곧 독서 여행의 사진첩이다.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의 책등을 눈으로 훑어보며 내가 언제 어떤 생각을 했었는지, 무엇이 고민이어서 어떤 책을 샀는지, 누구에게 어느 장소에서 책을 어떤 선물 받았는지, 누구와 함께 무엇을 먹으며 어떤 책을 읽었는지 떠올린다. 작년에 패기 넘친 상태로 들였다가 한 글자도 이해하지 못한 롤랑 바르트의 책들은 반짝반짝 빛나는 새 책의 상태로 순진무구하게 꽂혀 있다. 책장 한쪽 편에 모여 있는 박연준 시인의 산문집들을 보면 아름다운 문장을 쓰고 싶어 진다. 문득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중에 『달과 6펜스』에 눈이 간다. 가열차게 주인공 욕을 하며 읽었던 책이었는데, 이 책만 보면 지금의 삶을 모두 내팽개치고 훌훌 떠나고 싶어 진다.


역시 내 집에 이렇게 작은 도서관을 하나 마련해두니 마음 내킬 때마다 찾아갈 수 있어 편리하다. 아무래도 책은 계속 살 수밖에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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