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산동 서점 <그렇게 책이 된다>에서 만난 나의 첫 블라인드북
회사에서부터 지하철 역까지 이동하는 길에 영풍 문고를 지나친다. 지하철을 두 번 갈아타고 마포구청 역에 내린다. 5분 정도 걸어 가면 아주 작은 서점이 있다. <그렇게 책이 된다>라는 독특한 이름의 서점을 처음 방문했던 날, 나는 그 동안 김연수 소설가의 팬이라고 자처하고 다녔던 것이 조금은 부끄러워졌다.
여기 두고 갈게요
나는 이 서점의 일주년 행사 때 처음으로 이 곳을 방문했다. 그 며칠 전 서점의 인스타그램에서 확인한 "여기 두고 갈게요" 라는 블라인드북 맞교환 이벤트에 혹했기 때문이다.
책의 제목과 표지를 포장지로 완전히 가린 채 가벼운 힌트만 제공하는 '블라인드 북'이 동네 서점들의 단골 상품이 되기 전에, 2019년 상반기 TVN 드라마 「로맨스는 별책부록 」에 소개되기 전부터 늘 관심은 있었지만 막상 손이 가지는 않던 차였다. 인터넷 서점 알라딘 장바구니에 담긴 책은 이미 80만원어치가 넘었고, 제목도 모르는 책을 원래 책값에 포장비까지 추가된 값으로 사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나는 한 달에도 상당한 비용을 이미 책을 구매하는 데 지출하고 있었기에, 갖고 싶은 책이라면 이미 소장하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그런데 이 곳의 블라인드북 이벤트는 조금 달랐다. 나에게 의미 있는 책을 한 권 기부하면, 다른 사람이 기부하고 간 책 중 한 권을 가져올 수 있다고 했다. 마침 책장에는 내가 2019년에 읽고 가장 좋았던 책이 두 권 꽂혀 있었다. (책을 들고 돌아다니다가 잃어버린 줄 알고 한 권 더 샀는데, 그 후 맨 아래 책장 벽돌책들 사이에서 처음 구매한 책을 발견했던 참이었다. 참고로 책은 강민선 작가님의 『상호대차』 였다.) 돈을 한 푼도 들이지 않고 처음으로 블라인드 북을 체험해볼 기회였다.
구입 후 바로 책장에 꽂아둔 두 번째 책을 조심스럽게 가방에 넣어 지하철을 두 번 갈아타고 서점에 도착했다. 이제와 고백하지만 서점에 가까워지자마자 나는 "그냥 집에 다시 갈까" 라고 생각했다. 서점 바깥에서 보이는 큼직한 유리창 사이로 사람들이 바글바글한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만큼 걸어온 게 아까워 내키지도 않는 마음으로 조용히 문을 열었다.
서점에 들어선 뒤 나는 더욱 후회했다. 여덟 평 남짓한 공간에 손님이 일곱 명 가까이 있었는데, 다들 서로 친해보였다. 다들 '작가님' 이라고 부르는 키가 작은 여성 분이 한 명 있었고(나중에 알고 보니 고수리 작가님이었다!), 쌍둥이처럼 보이는 서로 꼭 닮은 남자 아이가 둘 있었고, 커다란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는 사람이 있었고, 집에서 책을 다섯 권도 넘게 가져와서 블라인드 북을 위한 메시지 카드를 하나 하나 쓰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서점 인스타그램을 통해 미리 얼굴을 확인했던 사장님이 반갑게 인사를 건네주어 조금 기뻤다. 그러나 다시 떠들썩해진 손님들 사이에서 나는 혼자 뻘쭘해져서 괜히 구석에 진열된 책만 구경하다가, 겨우 방문 목적을 달성했다. 창문을 향한 칵테일 바 식의 책상 앞에 앉아, 책에 어울리는 메시지 카드를 작성하고 사장님께 건넸다. 그리고, 이미 진열되어 있던 열 권도 넘는 블라인드 북들 중 카드의 문구가 가장 마음에 드는 하나를 선택했다.
이 책은 소설에 대한 저자의 감상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마음에 담아두었던 문장들,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랑 같은 것' 이죠.
저는 이 책에 제가 지치고 마음이 힘들 때마다 꺼내 읽는 문장이 있습니다.
'다들 지지 마시길. 비에도 지지 말고, 바람에도 지지 말고, 눈에도, 여름 더위에도 지지 않는 튼튼한 몸으로 사시길. 다른 모든 일에는 영악해지더라도 자신에게 소중한 것들 앞에서는 한 없이 순진하시길...'
누군지 아시겠나요? 그렇다면 어서 이 책을...
나는 누군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지지 말라는 말과 한 없이 순진하라는 말이 좋았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 블라인드 북 포장을 벗겨내었는데, 심장이 잠깐 멈추는 줄 알았다. 너무너무너무 좋아서.
김연수 작가님의, 『우리가 보낸 순간 - 소설 편 』이었다.
심쿵
나는 김연수 작가님을 무척 좋아한다. 요새 들어 '가장 좋아하는 작가님'이 계속 많아지고 있긴 하지만(구병모 작가님 윤이형 작가님 박연준 작가님 박상영 작가님..........) 원래 나의 최애는 김연수 작가님이었다. 그 분의 문장들에서 배어나오는 특유의 따뜻함, 사회에 대한 애정 때문에 너무도 좋아한다. 사실은 어쩌면 『사랑이라니 선영아』 때문일지도 모른다. 내 이름이 제목으로 등장하는 최애 작가의 소설이라니. H.O.T. 캔디를 듣는 우리 나라의 모든 "단지"라는 이름을 가진 분들이 나와 같은 마음이었을까.
그런데 이 책은, 내가 정말 좋아하는 (좋아한다고 생각한) 작가님의 책인데 태어나서 처음 보는 책이다. 이럴수가. 작가님의 『청춘의 문장들』도, 『시절 일기』도, 물론 『사랑이라니 선영아』도 소장하고 있지만 이런 책이 있는 줄은 몰랐다. 아무래도 나는 진정한 팬은 아니었나 보다.
<그렇게 책이 된다>의 블라인드 북 덕분에 나는 설렜고 동시에 겸손해졌다.
첫 방문하고 몇 주 후, 나는 한 번 더 서점을 방문해서 책 한 권을 더 맡기고, 블라인드 북을 하나 더 가져왔다. 다니엘 페나크의 『소설처럼』 이었다. 그 후 한 달에 꼭 한 번씩은 지하철을 두 번 갈아타고 가서 이 작은 서점을 방문했다. 큐레이션 서점 답게 책이 많지는 않았지만 색깔은 분명했다. 인권, 자연, 소수자, 사랑을 다루는 책들로만 가득했다. 이곳에서 나는 존 버거도 만나고, 메리 올리버도 만났으며, 김원영 변호사도, 막상 스페르민도, 사이토 마리코도 만났다. <그렇게 책이 된다>에서 데려온 책들은 하나 하나 표지 위로 햇살이 비추는 것만 같이 빛난다.
더욱 놀라운 일은, 이제 나는 서점에 방문할 때 종종 '떠들썩한' 무리에 속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첫 방문때 뵈었던 고수리 작가님도 이 책방에서 여러 번 다시 만났고, 당시 카메라를 들고 있던 분과 블라인드 북의 메시지 카드를 쓰고 있던 분들과도 무척 친해졌다. 그 뿐인가. 전화번호는 커녕 이름도 나이도 모르는 사람과 다니고 있는 병원 이야기를 털어놓고, 서점에서 얼굴을 딱 두 번 본 사람을 통해 브런치 글쓰기의 고민 상담을 받는다. 인위적이지도 않고 억지스럽지도 않은 서점 사장님의 자연스러운 중개 덕분이다. 이런 식이다.
- 사장님 : 선영님. 오셨어요? 그 동안 잘 지내셨어요?
- 나 : 네 별일 없으셨죠?
- 나 : 사장님. 휴 제가 어제 브런치에 올린 글을 하나 발행 취소를 했는데요. 무슨 일이 있었냐면요.
...
- 사장님 : 저는 이렇게 생각하는데요. 혹시 다른 분께도 여쭤보는 거 괜찮을까요?
(옆에 앉아 있던 손님을 부르며.) 같이 이야기해요!
...
...
...
- 나 : (마음의 평화!)
마음이 무거워질 때마다 찾아가 위안을 받았던 서점이 4월 24일자로 영업을 종료한다. 문을 닫기 전에 (아마도) 마지막으로 진행하는 이벤트는 다시, 블라인드 북이다. 이번에는 맞교환 방식은 아니고, 책 가격에 포장비가 천 원 추가된다.
처음 <내가 그렇게 책이 된다>의 블라인드 북 속에서 김연수 작가님을 만났고 느꼈던 설렘을 이 글의 독자분들도 느껴보았으면 좋겠다. 이 글은 그러니까 손님 A의 자발적인 영업글이자 홍보글이고, 곧 없어질 서점을 향한 나의 펜레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