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어 하나에 집착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한 단어도 놓치지 않는 고든 건드와
단어가 빠졌을 때 서슴없이 말해주는 욜란다 휘트먼을 위해.
추천사 쓰려고 글쓰기 외서 가제본을 보는데, 첫머리에 써 있는 저 구절에 한참을 머물러있게 된다. '한 단어'라는 말이 너무 절실해서. 너무 아름다워서. 한 단어에 집착하느라 시간을 뭉터기로 보내고 나면 안절부절하다가 자괴감이 든다. 뭐 지금 예술하려고? 하는 내면의 초자아가 나를 꾸짖고. 심지어 다음 문장이 두려워서 딴짓하는 거 같은 죄책감도 든다. 일물일어를 위해 고민하는 건 플로베르 같은 대문호가 해야할 일이지 내가 하면 유난 같다. 그런데 그 한 단어에 같이 집착해주는 사람이 있고 그걸 의논하고 떠들면 너무 좋다. 내가 미친 사람이 아니라는 위안, 인생 혼자 아니라는 감사 그런 감정들이 복받친다.
(2/19일, 은유 작가님 페이스북에서)
'좋아한다'라는 말밖에 할 수가 없어서
가끔씩 나 혼자만의 프로젝트를 구상하고는 한다. 2017년에 한 번은 '좋다'의 표현 수집하기 프로젝트를 시작한 적이 있다. 아니, 정확히는 시작하겠다며 신이 나서 블로그에 계획을 적어둔 후에 이어나가지는 못했었다. 이 프로젝트를 떠올린 건, 당시 TVN에서 방영한 <알쓸신잡> 1회에서 김영하 작가님이 햇살을 '바삭바삭하다' 라고 표현한 것에 감명을 받아서였다.
'정말 좋은' 순간들이 종종 있다. 좋은 책을 읽은 후에, 마음에 드는 문장을 만났을 때, 영화가 괜찮았을 때, 우연히 마주친 미술 작품 앞에서 나도 모르게 걸음이 멈췄을 때.
- 좋다
- 정말 좋아
- 진짜 진짜 좋아
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좋은 순간들이 괜히 조금 아쉬워 지는 건 나의 감정을 타인과도 공유하고 싶을 때이다. 정말 정말 좋아서 그 감정을 나누고 싶은데, 아무리 머리를 싸매고 단어를 끌어내봐도
'좋았다' 외에는 '감동했다' '재밌었다' 두근두근 했다' 정도밖에 떠오르지 않아서 답답하다.
나의 좋음은 그것보다는 조금 더 위에 있는데, 이 마음을 더 생생하게 표현하고 싶은데...
(2017.7월. 나의 블로그 글에서)
인스타그램에 종종 책을 읽고 난 감상을 글로 적어 올린다 (일명, #책스타그램). 글을 쓸 때마다, 나는 항상 '재밌었다', '즐거웠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 같은 뻔한 표현들과 사투를 벌인다. 책이 좋으면 좋을수록 '너무 좋았다' 라고 표현하는 거 말고 또 어떻게 적어야 할지 모르겠다.
단순히 나의 감상만 전달하는 데만 글의 초점을 둔다면, 많은 단어가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별점을 매기듯이 '매우', '너무', '완전'과 같은 부사들을 더하면 된다. '별로였다', '좋았다', '꽤 좋았다', '너무 좋았다', '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 좋았다' 만 가지고도 나의 마음은 충분히 표현될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조금 더 욕심을 내고 싶다. 햇살을 '바삭바삭'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는 언어를 구성하는 단어 하나 하나가 생각의 구조가 된다고 믿는다. 언어학자 소쉬르는 '인간은 자신의 사고로 언어를 구축하는 게 아니라 언어 구조로 자신의 사고를 구축해 나간다'고 말했다. 나는 오로지 노랑색 만 알고 있는 사람이 보는 세계보다 노란, 샛노랑, 누리튀튀, 노르꼬름, 누우런 색의 차이를 이해하는 사람이 보는 세계가 훨씬 다채롭고 아름다울 것이라 믿는다.
종종 들고다니는 일을 깜박하긴 하지만, 나에게도 한글 단어장이 하나 있다. 낯선 단어들을 적어두는 작은 노트다. 이 노트를 오랜만에 펼쳤다.
- 개는 큰 주인과 작은 주인을 앞서기도 하고 뒤서기도 하며, 길을 멀리 벗어낫다가 돌아오기도 하며, 이 겨울 속에서 해찰한다. [밤이 선생이다 - 황현산] (해찰하다 : 어떤 일에 정신을 집중하지 않고 다른 일이나 쓸데없는 짓을 하다.)
- 조금에 태어난 아이는 어장 일에 소질이 없다. [밤이 선생이다 - 황현산] (조금 : 조수(潮水)가 가장 낮은 때를 이르는 말. 대개 매월 음력 7,8일과 22,23일에 있다.)
- 언제부터였을까. 그의 반듯함이 나의 난잡함을 드러내고, 그의 여일함이 나의 광기를 불러내고, 그의 밝음이 나의 어둠을 일깨운 것은. 나는 그에게 포섭되는 대신 더 낮은 곳으로 추락했다. [친밀한 이방인 - 정한아] (여일하다 :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다.)
- 동쪽 하늘이 희붐하게 밝아와... [기사단장 죽이기 - 무라카미 하루키 - 홍은주 번역] (희붐하다 : 날이 새려고 빛이 희미하게 돌아 약간 밝은 듯 하다.)
- 내게 말을 거는 듯 했던 고요한 빛의 수런거림. 나는 바로 그런 수런거림을 듣기 위해 자정마다 아무도 몰래 숙소를 나와 무작정 걸었던 것이다. [단순한 진심 - 조해진] (수런거리다 : 여러 사람이 한 데 모여 수선스럽게 자꾸 지껄이다.)
*나는 수런거림 이라는 표현을 좋아한다(또 어쩔 수 없이 '좋아한다' 라고 쓰고 있는 나...). 그러니까 '지껄이다' 라는 의미를 단어를 가진 단어가 새삼스럽게 이렇게 이쁘다니.
처음 글을 쓰기 시작할 무렵 은유 작가의 책, <글쓰기의 최전선>을 읽었다. 당시 글을 쓰는 데 도움을 받으려고 선택했는데, 내용도 내용이지만 문장 하나 하나가 무척 '좋아서' (또!) 책 한 권을 다 필사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었다. 나에게는 플로베르이고 프루스트이고 TS 엘리엇과 같은 은유 작가도 글을 쓸 때 '한 단어'에 집착하느라 시간을 뭉터기로 보낸다고 한다.
글을 쓸 때 고를 수 있는 단어들을 많이 보유하고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