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 미움받을 용기

박상영 작가의 산문 『오늘 밤은 굶고 자야지』 리뷰를 두 번 고친 이유

by 선의
철학자 : 인간은 모두 인간관계로 고민하고 괴로워하네. 이를테면 부모님과 형과의 관계일 수도 있고, 직장동료와의 관계일 수도 있지. 그리고 지난번에 자네가 말했지? 더 구체적인 방법이 필요하다고. 내 제안은 이것이네. 먼저 ‘이것은 누구의 과제인가’를 생각하게. 그리고 과제를 분리하게. 어디까지가 내 과제이고, 어디서부터가 타인의 과제인가. 냉정하게 선을 긋는 걸세. 그리고 누구도 내 과제에 개입시키지 말고, 나도 타인의 과제에 개입하지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구체적이고도 대인관계의 고민을 단숨에 해결할 수 있는, 아들러 심리학만의 획기적인 점이라고 할 수 있지. p171


철학자 : 몇 번이고 말했지만,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모든 고민은 인간관계에서 비롯된 고민이다”라고 주장하지. 즉 우리는 인간관계에서 해방되기를 바라고, 인간관계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갈망하네. 하지만 우주에서 혼자 사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해. 생각이 여기에 이르렀다면 ‘자유란 무엇인가’에 대한 결론은 나온 것이나 마찬가지라네.
청 년 : 뭔데요?
철학자 : 단적으로 말해 “자유란 타인에게 미움을 받는 것”일세.
청 년 : 네? 무슨 말씀이신지?
철학자 : 자네가 누군가에게 미움을 받는 것. 그것은 자네가 자유롭게 살고 있다는 증거이자 스스로의 방침에 따라 살고 있다는 증표일세.
p186.
『미움받을 용기 -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위한 아들러의 가르침』기시미 아치로, 고가 후미타케 - 인플루엔셜)


어제 박상영 소설가의 신작 산문집 <오늘 밤은 굶고 자야지>를 읽고 인스타그램에 리뷰를 올렸다. 그중에 이런 내용을 넣었다.

예전에 나는 퀴어 소설을 읽는 게 불편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내가 술을 좋아하지 않아 권여선 작가님의 [안녕 주정뱅이]를 (최근엔 김혼비 작가의 [아무튼, 술]을 읽지 않은 것과 비슷하게, 내가 공감할 수 없는 영역이기에 관심을 두지 않는 거라 단순하게 여겼다. 내 주변에도 그런 사람들이 많다. 성 소주자들의 사랑을 반대하진 않고 (요새 그런 무지한 사람은 드물다) 되려 응원하는 편이지만 그래도 굳이 찾아서 보고 싶지는 않다는 사람들.

그러다 박상영 소설가의 작품들을 만났다. "자이툰 부대에서 섹스를 하는 동성애자들, 인스타그램에 빠져 사는 관종, 죽도록 바람을 피우는 연인들, 불법 촬영물의 피해자, 자해를 하는 아이들이 등장하는(p14)" 소설들이 무지하게 재밌어서 그의 팬이 되었다. 이제는 퀴어의 사랑을 다룬 작품들도 부지런히 읽는다. 머리로는 응원하고 있지만 나에게 해당하는 사항이 아니어서, 내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사항이 아니어서,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불편하게 느껴지는 일들에 대해서는 소설도 영화도 더 적극적으로 찾아가며 편해지려고 한다.



여기서는 첫 문단의 마지막 문장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성 소수자들의 사랑을 반대하진 않고 (요새 그런 무지한 사람은 드물다) 되려 응원하는 편이지만'은 처음에는 (요새 그런 무식한 사람은 드물다)라고 썼다. '무식'이라고 쓰는 게, 나로서는 가장 솔직한 표현이었다. 그러다가 글을 올리고 나서 표현을 수정했다.

(요새 그런 사람은 드물다)라고.


나는 성 소수자들의 사랑이나 결혼에 대해선 찬성이나 반대할 수 없는 성격의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일부 "결혼 제도"에 대해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사랑은 모르겠고 제도적으로 결혼을 허가하는 것에 대해 반대 입장을 표명한다(역시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거기까지는 일단 넘어가더라도, 그들의 '사랑'까지 반대하는 건 한마디로 무식한 거고 못 배운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차마 인스타그램에는 그 말을 쓸 수가 없는 거다. 일단 회사 사람들도 여럿 팔로잉하는 계정이라는 점이 걸렸고, 아주 독실하고 보수적인 개신교 부장님 한 명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동성애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악'이라고 생각해서 SNS에 그런 의견들을 거침없이 표현하는 사람이다. 사람이 나쁜 건 아닐텐데 잘못된 믿음에 사로잡힌 케이스라 생각한다. 혹시,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끼는 주변 사람들 중에, 태어났을 때부터 마음을 내어준 어떤 종교적인 믿음 때문에 그런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어쩌지. 혹시나 내가 '무식한 사람'이라고 쓴 것 때문에 그들과의 사이가 틀어지면 어쩌지.


그런 연유로 어제는 무식, 이라는 단어를 지웠다. 오늘 아침엔 다시 무지라는 단어로 바꿔 넣었다.

크게 차이가 있는 단어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런 형용사 없이 '그런 사람'이라고만 적어두기는 싫었다.


(이 글을 쓰면서도 나는 조심스럽다. 너는 왜 그렇게 겁이 많니 - 왜 맞는 걸 맞다고 표현하는 일에 이렇게 구구절절한 글까지 써야 하니 - 라는 소리를 들을까봐.)




누구에게나 글을 쓰는 목적이 있겠지만, 나는 아직 정치적이나 사회적으로 의견이 갈리는 이슈에 대해 내 입장을 표명하는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없다. 막 글쓰기의 재미를 알게 된 초보 작가인데 괜히 논란의 한복판에 뛰어들었다가 상처 받은 후 글에 대한 애정까지 잃게 될까 봐 두렵다. 꼭 글을 쓸 때가 아니더라도 나는 일상에서 정치적인 발언은 굳이 피하려고 한다. (물론 관심이 아예 없는 건 아니고, 혼자 공부하고 혼자 고민하고, 트위터에서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랜선 공감하고는 있다.)


그런데 이야기를 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불쑥불쑥 튀어나와 버리는 마음들이 있다. 요새 코로나 19의 전개 과정에 따른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 느낀 건데, 지금의 사태에 대해 분노를 느끼는 사람들이 있고, 상황은 몹시 불편하다 느끼지만 그 와중에 애국심이 넘치는 사람들이 있다. 그 미묘한 반응의 차이에서 정치적인 입장이 엿보인다. 생각 없이 잠깐 대화를 나눴는데 그냥 모르고 지나가고 싶었던 상대의 정치적 입장을 알게 되어 당황한 적도 여럿이다. (특히 내가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하는 사람이 나와 정치적인 입장이 다른 경우 그랬다.)


박상영 소설가의 소설에 관해서도, 성 정체성을 다룬 아룬다티 로이의 소설 <지복의 성자> (이 소설의 주인공은 남성과 여성의 성기를 한 몸에 지닌 채 태어났다. 부모는 그를 남성으로 키우려고 하지만 본인은 스스로를 여성으로 정체화한다)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백 래쉬>의 저자 수전 팔루디의 신간 <다크룸> (이 회고록에는 폭력적이고 가부장이었다가 70대에 트랜스 여성 MtoF가 된 저자의 아버지를 소개한다)을 리뷰할 때도, 은연중에 성 정체성, 성 소수자에 대한 독자의 입장이 어쩔 수 없이 배어 나올 수밖에 없다.




나에게 필요한 건, 내가 쓴 글로 인해 '미움받을 용기'이다. 나는 미움받는 걸 극도로 두려워하고 있다. 그러나 심리학자 아들러는, 누군가에게 미움을 받는 것이야말로, 내가 자유롭게 살고 있다는 증거라고 한다.


어쩌면 나는 학창 시절에 아직도 갇혀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반 친구들에게 찍히고 미움을 받으면, 어디에도 도망갈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중고등학교 때, 나는 필사적으로 사랑받기 위해 애썼다. 이제는 그 강박을 내려놓을 때도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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