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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의 Jan 01. 2020

시를 읽는 마음을 시가 꿰뚫어올 때

"식탁 위의 연설"  <사랑을 위한 되풀이> 황인찬 시집 / 창비

시는 너무 어려워.


문학과 지성사, 창비, 문학동네, 민음사 등의 출판사에서 내는 현대시집을 한 권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면 그래서 시인이 말하고 싶은 건 무엇이었는지, 스토리가 무엇인지 결론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첫 시집 한 권을 띄엄띄엄 읽은 후 꽤 오래 동안 '시'라는 걸 읽겠다는 욕심을 내려놓았다. 미련 없이.


처음으로 서점에서 시집을 구입해서 읽은 지 이제 삼 년이 조금 지났다. 지금도 시는 처음과 마찬가지로 똑같이 어렵다. 그래도 그동안 계속 읽었는데 나의 이해력은 조금도 나아진 게 없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시를 사랑하고 있는 것 같다. 사랑하고 있다.



얼마 전, 창비에서 연말 에디션으로 얇은 표지를 덧씌워 제작한 황인찬 시인의 [사랑을 위한 되풀이]를 책장에 새로 들였다. 집에 아직 안 읽은 시집들도 많지만, 이번 시집은 도무지 놓칠 수가 없었다. 혹시나 이 시집의 실물을 보지 못했다면, 서점에서 꼭 한 번 구경해보기를 권한다. 표지는 창비의 기존 시집 디자인 그대로인데, 얇은 한지 느낌의 겉표지 하나 더했다고 시집이 이렇게나 더 고와질 수 있다니. 시집 제목을 둘러싼 잎사귀들과 실 자수의 문양은 아주 조용하고 은은하게 크리스마스를 축하하고 있다. 시집을 열어보지 않고 표지의 제목만 오래 동안 뚫어지게 봐도 마음이 들뜨는 기분이다.


동네 스타벅스, 내가 좋아하는 코너 자리에 앉아 가만히 감성을 장전했다.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을 테이블 위에 두고 시집을 읽는 연말 감성이라니, 너무 좋잖아? 한 장 한 장 눈으로 천천히 페이지를 쓰다듬으며 읽고, 마음에 드는 시를 만나면 플래그를 붙이다가 42페이지의 시 앞에 도달했다. <식탁 위의 연설>.


피식, 나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왕십리는 미아리가 되고 차창에 들어오는 빛이 옥스퍼드 셔츠가 되고 유모차는 다리 저는 개가 되고

잠들어 기댄 어깨가 어두운 종점이 되고
늙은 나무는 고향집의 은유가 되는

그것이 삶이라니

(... 중략...)

너무 이상해

문을 열고 나가면 아는 것들만이 펼쳐져 있는데,
문을 열고 나가면 모르는 일들뿐이라니


<식탁 위의 연설> 중 일부 발췌
[사랑을 위한 되풀이 - 황인찬 - 창비]


시인의 친구가 답답함에 못 이겨 시인에게 외치는 것 같다.


"왕십리는 미아리가 되고,

차창에 들어오는 빛이 옥스포드 셔츠가 되고

유모차는 다리 저는 개가 되고

잠들어 기댄 어깨가 어둠이 된다고??

문을 열고 나가면 다 아는 것들인데, 문을 열고 나가면 모르는 일들 뿐이라고??


도대체 (시인으로서의) 너의 삶은 어떻게 생겨 먹은 거니?

그러면 책상은 흐린 날씨가 되고 핸드폰이 어제 먹은 소보루빵이 되는 거고 우리의 내일 점심 약속은 꿈속에서 봤던 그 남자의 범죄인 거고, 예약 구매 한 에어팟 프로는 엄마가 스무 살에 바다에서 찍은 사진이 되는 거니?

나는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는데, 너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니?


그냥,

책상은 책상이고, 핸드폰은 핸드폰이고, 점심 약속은 점심 약속이고

에어팟 프로는 에어팟 프로라고 말하면 너의 삶도 조금 더 편하지 않겠니?"


라고.



근데,

회사에서는 책상이 책상이어야 할지 몰라도 문학에서까지 모든 게 글자 그대로면 조금 지루하지 않나?


나는 시를 읽을 때면, 오히려 낯선 이미지가 반가워진다. 가만히 상상하면 그 어떤 생경한 단어들도 자석처럼 착 달라붙는다. 손에 잡힐 듯 말 듯 애매한 개념이 시간을 들일 수록 단단해지고 강해진다.


위의 시 <식탁 위의 연설>에서는 차창에 들어오는 빛이 옥스포드 셔츠가 된다고 했다.

나는 새벽 버스를 타고 오랜만에 어머니를 만나러 가는 스물일곱의 청년을 떠올린다.

다림질에 서툴러 매일 구깃구깃한 셔츠를 입고 다녔지만

어머니께 아들 잘 살고 있어요, 보여드리기 위해 어제 처음으로 셔츠를 세탁소에 맡겼다.

버스 차창으로 들어오는 빛이 주름 하나 없이 납작하게 다려진 옥스퍼드 셔츠에 와 닿는다.

빳빳한 셔츠 옷깃 새로 빛이 스며든다.

교통 체증으로 인해 청년은 조금 늦게 집에 도착할 테지만,

어머니는 한 상 가득 차려놓은 아침밥을 한 술도 먼저 들지 않은 채 청년을 기다릴 테고

문을 열고 하얗게 빛나는 셔츠를 차려입은 아들이 집에 들어오는 순간 배가 부를 것이다.


*

물론, 시를 읽을 때 모든 단어 하나하나마다 이렇게 길고 구체적으로 상상을 하지는 않는다. 보통은 아주 얕고 작은 한 조각의 느낌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갈 뿐이다. 그러다가 어떤 시는 조금 더 무겁고 굵직하게 느껴지고, 그런 시에는 한참을 머물러 있게 되기도 한다. 오래 붙잡고 앉아 여러 갈래로 곱씹고 그려보고 싶은 시, 그런 시를 만나기 위해 이따금 나는 시집을 꺼내어 든다.



우리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걸 사랑할 수 있을까?

사랑할 수 있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작은 아기를 우리가 이해해서 사랑하는 건 아니듯이.

꼬질꼬질한 아기의 땀 냄새 분 냄새와 오동통한 발가락 하나 하나를 만질 때 괜히 미소가 지어지듯이

아기가 울고 있으면, "응 그래 우리 아기 엄마가 많이 보고 싶었어요,"라고 달래듯이

시를 쓴 마음에 가 닿기 위해 애쓰고 이해하고, 해석하거나 혹은 해석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이 어쩌면 시집을 읽는 마음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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