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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의 Sep 04. 2020

우리에게 필요한 건 초능력이 아닌 능력

아침 일찍 남편과 병원에 다녀왔다. 그리고 한 시간 전, 병원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오늘 아침에도 나에게 밝게 인사를 해준 담당 간호사의 목소리였다. 통화기 너머로 내 이름 세 글자가 맞는지 확인하는 목소리가 조심스러웠다. 바로 알았다. 이번에도 잘 되지 않았구나. 내 예상은 엇나가지 않았다. 아침에 하고 온 피검사 결과가 0점대였다는 소식이었다. 오늘 나는 10번째 시험관 시술에 실패했다.


전화는 스피커 폰으로 받았기에, 오늘 하루 휴가를 내고 옆에 있던 남편도 함께 소식을 들었다. 다음 병원 진료는 바로 다음주 월요일이다. 다시 난자 채취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전화를 끊고 조금 뒤 남편은 거울 앞에 서더니 갑자기 다짐을 한다.


- 나 말리지 마. 오늘부터 다이어트야.

- 아니 오빠. 집에 삼겹살도 있고 닭다리도 있는데 일단 이거부터 다 먹고.

- 아, 그래.


다이어트는 난자 채취 전에 우리 부부가 하는 준비 의식 같은 거다. 좋은 수정란이 나올 수 있도록 식단과 운동에 특별히 신경을 기울이며 몸을 더욱 건강하게 변화시키는 일. 사실 최근 우리 부부가 좀 잘 해먹기는 했다. 코로나 때문에 헬스장을 갈 수 없다는 핑계로 집에서 꿈쩍도 안하고 널부러져있기도 했고. 다음주 부터는 남편도 나도 정말로 다시 다이어트에 돌입할 예정이다. 우리는 가열차게 하이파이브를 하고 의지를 다졌다.



가끔 인터넷 유머 게시판에서 단순한 재미로 선택을 해볼 수 있게 하는 글을 볼 때가 있다.

- 고층 빌딩에서 딱 10초만 매달려 있으면 천 억을 받을 수 있다. 당신이라면 도전하겠는가?

- 7평 남짓한 방이 있다. 이곳에선 인터넷이 되지 않지만 원하는 건 사람을 제외하고 무엇이든 들고 갈 수 있다.

  이곳에서 혼자 3개월 동안 생활하면 1억을 받을 수 있다. 당신이라면 하겠는가?


현실에서 진짜로 주어지는 선택 사항도 아닌데, 이런 글을 볼 때마다 나는 잠시 멈춰 서서 나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참고로 나는 고층 빌딩에서 매달리는 건 절대 No!, 7평 방에서 생활하는 건 책만 있다면 Why not? 이다.) 이런 류의 '선택' 게시물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건 역시 원하는 초능력을 선택해보는 일이다. 투명인간이 되는 일도, 돌을 황금으로 바꾸는 일도, 공간 이동을 하는 일도 모두 불가능한 일이지만 상상을 하는 것 만으로도 즐겁다. 특히 재택 생활이 길어지고 있는 요즘, 국경을 초월해서 공간 이동을 할 수 있는 초능력은 여느때보다도 간절하다.


그런데 요새는 초능력에 대해 또 다른 생각을 갖게 된다.

이 아홉 개의 사탕 중에 나는 김치맛이 가장 끌린다. 그러나 "김치맛" 사탕이라니, 생각만해도 끔찍하다.


초능력이라는 단어는 '능력' 앞에 '뛰어넘을 초'가 붙어 생긴 단어다. 사람의 능력을 초월하는 그 이상의 능력. 이와 비슷하게 영어 단어인 supernatural은 자연스러운 걸 넘어서는 초자연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럼 초능력은 사람의 자연스러운 순리를 넘어선 능력이라고 볼 수 있을까?


나는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생각하고, 치매로 요양 병원에 계신 친할머니와 치매가 조금씩 진행되고 있는 외할머니를 떠올린다. 뇌종양으로 큰 수술을 여러 번 거친 우리 아빠를, 유방암 1기 수술을 받은 우리 엄마를 떠올린다. 병은 여러 번 크고 작게 우리를 거쳐가고, 죽음은 예고 없이 필연적으로 찾아온다. 우리는 모두 가족의 건강을 바라지만 그건 자연스러운 순리가 아니다.

늘 건강하기만 바라는 건 어쩌면 초능력이 생기기를 바라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또 나는 남편을 따라 미국으로 유학을 가자마자 덜컥 임신이 되었던 친구를 떠올린다. 오래 꿈꾸었던 학문의 입구 바로 앞에서 친구는 꿈을 포기하고 아이를 낳고 기르는 삶을 선택했다. 계획대로 임신을 했지만 유산의 아픔을 겪어야 했던 친구도 생각한다. 아이가 생겼는데 어느 날 사라지는 일은 내가 다행이도 아직 겪지 않은 일이고,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아픔이다. 아이가 생기고 생기지 않는 일도 사람 마음대로 되는 일은 아니다. 누구나 원하는 때에 맞춰서 생명을 잉태할 수 있는 능력, 그것도 어쩌면 초능력이라 불리울 수도 있을 것이다.


시험관을 세 번째 실패했을 때쯤 나 혼자 쓸데 없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었다. 얼마를 받으면 아이를 갖는 일을 포기할 수 있을까? 천억? 일조? 아마존의 제프 베조스가 가진 재산의 열 배를 가지는 것과 나와 남편의 아이를 갖는 것 중에 선택을 한다면 나는 큰 고민 없이 돈을 거절하고 아이를 갖는 쪽을 선택하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런데 나 뿐만아니라 다른 어느 사람들도 마찬가지일거라 생각한다. 어마어마한 재력을 얻는 일, 공간 이동을 하는 일, 남의 마음을 읽는 일, 투명 인간이 되는 일 모두 마법처럼 멋져 보이지만, 결국 사람들은 단 한 가지 소원을 이룰 수 있다면 그 어떤 초능력을 갖는 것 보다도 자기 아이가 건강하고 바르게 자라주는 것, 부모님이 늘 건강한 것, 자신의 꿈을 이루는 걸 빌게 될 거라고.



마음대로 되지 않은 일이 너무도 많다는 걸 이제서야 나는 알겠다. 주위 사람들이 평생 아프지 않고 건강했으면 하는 바람은 분명 이뤄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 부부에게 아이는 때가 되면 생길 것이고 어쩌면 생기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인간의 자연스러운 능력 이상의 초능력을 바랄 때가 있다.


그러나 초능력을 잠시 제쳐두었을 때 나의 능력 안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은 분명히 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주위 사람들 챙기며 긍정적으로 삶을 바라보는 일. 살아가다가 내리막길을 만나더라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일.


당장 다음주부터 남편과 다이어트에 돌입한다고 말했지만, 오늘 저녁은 일단 냉장고의 삼겹살을 맛있게 구워 먹을 것이다. 닭다리는, 내일 양념 치킨 황금 레시피를 검색해 봐야겠다. 요리를 해서 맛있게 먹는 것도 우리 능력 안에 있는 일이다.


초능력은 필요 없다, 우리 부부에게 삼겹살이 있다면. 오늘 하루 우리가 풀 죽지 않고 즐겁게 보낸다면 그건 그 자체로 충분히 훌륭한 능력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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