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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의 Sep 07. 2020

예상을 깬 나의 첫 화상 스페인어 수업

Now we are old and grey, Fernando - ABBA

결혼 전부터 나는 아이폰을 썼다. 지금의 남편 말고도 여러 남자친구들을 만났다. 그러는 와중에 나는 아이폰의 영상 통화 기능인 Facetime을 단 한 번도 사용해본 적 없다. 영상 통화를 하는 건 나에게 무척 불편하고 어색한 일이다. 나는 카메라에 내 얼굴이 어떻게 비치는지 실시간으로 의식해야 할 것이다. 코로나 19 때문에 Zoom을 활용한 영상 모임들이 성행하고 있지만 아직 참석해본 적은 없다. 집에 있을 때 나는 아주 많이 꼬질꼬질하고, 그 모습을 굳이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다. 그렇다고 영상 통화를 위해 모습을 단장하는 것도 귀찮고.


문제는 이거다. 내가 알아본 전화 스페인어 수업이 skype를 이용한 화상 수업으로만 제공된다는 것이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중남미 사람에게 내 민낯을 보인다니. 사실 나는 올해 초 마스크를 쓰고 다닌 이후로 공식 석상 (양 부모님을 만나는 자리거나, 결혼식에 참석하는 자리)을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화장을 한 적이 없다. 그러나 그건 아무도 나에게 별 관심이 없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영상 통화는 왠지 다르게 느껴진다. 나는 핸드폰으로 카메라를 셀카 모드로 켰다. 아이폰 화면으로 보이는 내 행색이 너무 초라하다. 내 얼굴이 화면을 가득 채운 채 지구 한 바퀴를 날아간다는 사실이 기껍지 않다. 그러나 어쩌리. 나는 블로그의 여러 리뷰글들에 이미 현혹된 상태다. 그 블로거들은 긍정적인 리뷰를 올린 대가로 추가 수업 할인 혜택 같은 걸 받았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그 혜택을 충분히 받을 만하다. 내가 마침내 화상 스페인어를 신청하기로 마음먹었으니까. 오전 9시쯤 사이트에 회원 가입을 했다. 레벨 테스트는 당일 오후 2시로 잡았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했었지.


12시 56분. 누군가 나에게 스카이프로 말을 걸었다. 자신을 Fernando라고 소개한다. Abba의 노래 페르난도와, 맘마미아 2가 떠오르는 이름이다. 내가 아는 페르난도의 이미지는 남자다. 그런데 여태껏 내가 경험한 모든 전화 외국어 선생님들은 여자였다. 중국 요동에 사는 전화 중국어 선생님이었든, 캐나다에 사는 전화 영어 선생님이었든. 나는 곧 성을 이름처럼 사용하기도 하는 미국을 떠올렸다. 페르난도는 그럼 스페인의 Family Name 같은 걸까. 엉뚱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 순간 나에게는 꽤 진지한 고민이 머리 속에 떠올랐다.

- 혹시, 브래지어를 입고 수업에 응해야 하는 걸까.


그, 혹은 그녀는 나에게 처음부터 스페인어로 말을 걸었다. 혹시 지금 (예정보다 한 시간 이른 시간)에 레벨테스트를 진행해도 될지 나에게 물었다. 나는 스페인어 완전 초급은 아니었기에, 구글을 적당히 찾아가며 스페인어로 대답을 했다. 어차피 그때도 나는 집이었으므로, 10분 후에 가능하다고 대답을 보냈다. 그 10분은 마음의 준비와 핸드폰 카메라 각도 설정을 위해 필요한 시간이었다. 나는 독서대 위에 책을 얹어두고 그 위에 핸드폰을 놓아서 딱 내 쇄골 언저리까지 보이도록 위치를 고정했다.


(*전화 스페인어 레벨테스트를 신청할 때 본인이 생각하는 언어 구사 레벨, 그리고 스페인어 외에 설명 시 사용할 언어(한국어/영어 중에 선택 가능)를 고르게 되어 있다. 내가 어느 정도 '기본 문장 사용 가능'/'영어'를 선택을 했기에 강사도 바로 스페인어로 말을 걸어왔을 것이다.)


그리고 10분 후, skype로 영상 통화가 걸려 왔다. 화면에 은발 노인의 모습이 비쳤다. 중남미 사람이지만, 영화에서 아주 흔하게 볼 수 있는 전형적인 미국 할아버지처럼 생긴 모습이었다. 성별도 나이대도 나의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나는 최선을 다해 당황감을 숨기고 대화에 응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스페인어로 말을 해보는 순간이었다.


닮은 건 아니지만, 살짝 요런 느낌


레벨테스트는 30분가량 진행되었다. 태어나서 그렇게 길고 정성 들인 레벨테스트는 처음이었다. 만약 전화를 통해 음성으로만 진행했으면 나는 금방 지쳤을 것이다. 그러나 상대의 눈을 쳐다보며 때로는 천천히, 자주 말을 반복해 가면서 소통을 하는 일은 무척 즐거웠다. 낯선 언어를 사용하느라 자주 더듬었지만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레벨테스트를 시작한 지 15분쯤 지났을까. 화상 통화라는 경험과 익숙지 않은 언어를 듣고 말하고 있다는 일에 조금은 익숙해졌을 때 페르난도의 화면 뒷 배경에 있는 책장에 누워 있는 고양이 한 마리가 보였다. 나는 페르난도의 레벨테스트 질문에 바로 답하지 않고 난데없이 "Hay un gato! (고양이가 있네요!)"라고 외쳤다. 단순히 질문에 답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으로 자발적으로 내가 원하는 문장을 내뱉어본 순간이었다. 역시, 중남미 사람들도 우리와 별 다를 게 없는 듯 페르난도는 고양이가 언급되자마자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었다. 고양이를 둘 기르고 있는데, 그 아이들 모두 한국에서 데리고 왔다고 했다. 나는 고양이를 기르지 않지만, 순간 페르난도와 조금은 가까워진 것 같았다.


30분의 레벨테스트는 첫 수업 시간을 정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아직 수업비 입금하기도 전이었지만, 선생님과 수업 희망 요일과 시간을 맞추고 첫 수업을 기약하는 것이 레벨 테스트의 강사 프로토콜 마지막 단계인 것 같았다. "그럼 이번 주 목요일에 봐요"라고 인사를 해버리면, 괜히 입금을 하지 않을 수 없어지는 마음의 짐 같은 게 생겨 버리는 것이다.


레벨테스트가 꽤 만족스러웠는데도, 내가 통화를 끊고 가장 먼저 한 일은 해당 화상 스페인어 사이트에 찾아가 강사진 프로필을 둘러보는 것이었다. 여자 강사가 많긴 했지만 남자 강사들도 많았다. 그러나 나이대가 있어 보이는 건 페르난도 한 명뿐이었다. 남자 강사 중에는 프로필 사진 상으로는 연예인처럼 얼굴이 잘생긴 강사도 있었는데, 소개를 보니 무용을 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혹시라도 이 사람과 레벨테스트를 하게 되었다면, 나는 분명히 강사를 바꿔달라고 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너무 잘생기면... 아무래도 부담스럽다.


나는 내 나이대의 여자 강사에게 조금 더 편하게 수업을 받고 싶다는 유혹을 억누르고 조금은 의리 같은 마음으로 페르난도 할아버지에게 계속 수업을 받기로 했다. 그건 무척이지 잘 한 선택이었다. 레벨테스트 날에는 어떤 사정으로 한 시간 일찍 진행하게 된 것인지 모르지만, 그 후 수업은 늘 정각에 시작해서 종료 시간보다 조금 더 여유 있게 끝이 난다. 수업을 마무리할 시간이 되었어도 당일 진행하던 교재의 진도가 아직 다 나가지 않았으면 마지막 문제를 풀 때까지 강사가 먼저 수업을 끊지 않는다. 10분 단위로 촘촘하게 수업이 배정이 되어 있어 종료 시간만 되면 하던 대화도 도중에 끊어버리고 마무리를 지었던 이전의 전화 영어 선생님들과는 달랐다.


화상 스페인어 수업을 몇 번 경험해보고나니까 지금은 확실히 화상 수업을 전화 수업보다 선호하게 되었다. 특히나 초중급 레벨에서 익숙하지 않은 언어로 대화를 할 때, 상대와 얼굴을 마주하고 눈빛을 주고 받으니 스페인어가 훨씬 잘 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내가 말을 하는 것도 왠지 더 편한 느낌이다. 종종 내가 하고 싶은 말의 단어를 찾지 못해서 말하다가 잠시 멈춰 있으면, 상대는 나의 표정을 읽고 '얘가 지금 생각을 하고 있구나'라고 판단해서 기다려준다. 역시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게 음성 언어가 전부가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


무엇보다,

초기의 우려와의 달리 나는 그 동안 수업에서 단 한 번도 화면에 내 모습이 어떻게 나올 지 의식한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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