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선의 Sep 22. 2020

영어 일기에는 거짓말을 쓰면 좋다

아니면 작년 일을 갑자기 다시 꺼내어 써도 좋고


지난주 저녁, 나는 남편과 거실 소파에 등을 기댄 채 무릎에는 큼직한 마쉬멜로우 쿠션을 올려두고 스마트폰을 만지작 거리면서 TV를 보고 있었다. 자정까지는 세 시간 남짓 남아 있었다. 나는 세상 편한 자세로 비스듬히 누워 카카오톡 단체톡에 영어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요즘 나는 카카오 프로젝트 100 베타에 참여하여 매일 외국어로 세 줄의 일기를 쓰고 있다. 매일 번갈아가며 영어, 중국어, 스페인어로 일기를 쓰는 것이 나의 목표이며, 현재까지는 프로젝트 시작 후 15일 연속 빠짐없이 인증을 완료한 상태다.


매일 습관적으로 일기를 쓰다 보니 더 확실하게 알게 된 건데, 나는 정말이지 매일 하루 종일 집 안에서 하는 일이 별 게 없다. 중국어 스페인어 영어 공부를 하고, 책을 읽고, 글을 쓴다. 때가 되면 밥을 차려 먹고, 남편이 집에 오기 직전 급히 설거지를 하고 집을 치운다. 사건 사고 없는 평안한 날들이다.


그래서 그런 별 일 없는 이야기들을 쥐어 짜내어 일기를 적기 시작했다.

Today I stayed home all day. I read the SF novel, <The Martians>...

- 나는 오늘 하루 종일 집에 있었다. 나는 SF 소설 <마션>을 읽었다...


문득 자세가 삐뚤어져 있는 것 같아 허리를 바로 세우던 중, 나는 현실 자각을 했다.


이렇게 백날 똑같은 일기를 써봤자 영어 실력이 늘겠나. 안 늘지


애초에 나는 매일 비슷한 집안 일상을 백 가지 다른 버전으로 쓰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 100일 일기 쓰기 프로젝트를 신청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고 보면 화상 스페인어 수업 때도 나는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었다. 일주일에 두 번, 수업이 시작되면 강사는 나에게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뭘 했는지 물어본다. 그러면 나는 세상에서 가장 자신 있는 스페인어 문장들로 이렇게 대답을 한다.


Este fin de semena me he quedado en casa con mi esposo. No pasó nada especial, como siempre.

- 이번 주 주말 나는 남편과 집에 있었어요. 언제나 그렇듯이, 특별한 일은 없었어요.


가끔은 날씨를 언급하기도 하고, '책을 읽었다', 'TV를 봤다' 정도가 추가되기는 하지만 여기서 크게 벗어나진 않는다. 그럼에도 아주 사소하지만 새로운 표현이 하나 추가될 때마다 'ex. 남편을 잠을 하루 종일 잤어요' 나는 문법이나 동사 변화에서 실수를 하고, 강사는 올바른 표현으로 교정을 해준다.


나는 어쩜 이렇게도 쓸데없이 솔직하기만 한 바보였던가.


어차피 목표는 외국어 실력 향상이고, 일기를 쓰고 지난주에 무얼 했는지 말하는 일은 어디까지나 수단일 뿐이다. 일기에 내가 집에서 오늘도 별 일 없이 보냈다고 쓰든, 광화문 광장에 가서 백 명의 행인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췄다고 쓰든 정말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아니, 그러게까지 말도 안 되는 뻥을 치지 않더라도, 단순히 "오늘 <마션>을 읽었다"라고 말하기보다 오늘 읽은 <마션>의 주요 내용을 요약하기만 해도 되는 거였다. 난데없이 일 년 전 회사에서 조직 개편 중에 일어났던 사건을 묘사하며 마지막에 "오늘 갑자기 그 일이 생각이 나서 혼자 웃었다"라고 마무리해도 되는 거였다.



어제 화상 스페인어 수업, 나는 근황을 물어보는 강사의 질문에 대한 답으로 다짜고짜 나의 책 취향을 밝혔다.

Ayer, leo un libro. Me gusta mucho leer libros. En verdad, mi libro favorito se llama <Cien años de Soledad> de Gabriel García Márquez. Conoce a este libro?

- 어제는 책을 읽었어요. 저는 책 읽는 걸 무척 좋아하거든요. 사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책 중 하나는 가브리엘 마르케스의 <백 년 동안의 고독>이에요. 이 책을 아시나요?


사실 <백 년 동안의 고독>을 재밌게 읽었긴 하지만 가장 좋아하는 책까지는 아니다. 중남미 작가의 소설이라 강사도 알 것 같아서 언급한 것일 뿐이다. 책의 제목을 듣고 강사는 무척이나 반가워했다. 평소 같았으면 2분이면 끝났을 근황 공유 시간이었지만, 콜롬비아에서 접속한 강사와 한국에서 접속한 나는 공통으로 읽은 책 한 권 덕분에 10분 가까이 프리토킹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


오늘 나의 영어 일기에는 뭐가 되었든 'cheek by jowl'이라는 표현을 구겨 넣을 것이다. 영어 잡지를 읽다가 새로 알게 된 표현인데, 서로 매우 가깝다는 뜻이라고 한다. 잡지에서 이 표현은 이렇게 쓰였다.

'...millions of people living cheek by jowl with domestic birds and livestock...'
- ...국내의 조류와 가축과 매우 가까이 살고 있는 수백만명의 사람들이...


그래 봤자 내가 'cheek by jowl'을 적용할 수 있는 대상은 결국 남편뿐이다. 오늘의 일기는 이렇게 써야겠다.


2020.9.22 Dear Diary

During summer, I had to live cheek by jowl with my husband in the living room all day, because it was the only place we had the airconditioner running full time. When my husband was watching TV, I had to use my airpod and play my 'Music for Reading' playlist on YouTube in order to read a book in peace. Now the weather has cooled down, so at last I can get away from my husband and read at a much quieter bedroom - which still is only a few feet away from the living room.

- 여름 내내 나는 남편과 거실에 가까이 붙어 있었어요. 왜냐면 우린 거실에만 하루 종일 에어컨을 틀어놨거든요. 남편이 TV를 보면 저는 평화롭게 책을 읽기 위해 에어팟을 꽂고 유튜브에서 '독서할 때 듣기 좋은 음악' 플레이리스트를 틀었어요. 이제 날씨가 어느 정도 선선해졌으니, 나는 남편에게서 벗어나 더 조용한 침실에서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었어요 - 그러나 그것도 거실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건 아니지만요.


외국어 공부에도 창의력이 필요한 법이다.







(제목 사진 : March Schaefer - Unsplash)

이전 02화 예상을 깬 나의 첫 화상 스페인어 수업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