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해 보였던 회화 교재의 결정적인 흠
그 중국어 교재는 완벽해 보였다. 회화 지문에는 신규 트렌드와 IT 용어들이 적절히 포함되어 있었고, 난이도는 딱 나에게 맞춘 듯 너무 어렵지도 쉽지도 않았다. 그건 당연한 결과였다. 그 교재를 찾기까지 나는 광화문 교보문고 서재에 꽂혀있는 중국어 고급 회화 교재를 모조리 다 꺼내서 확인했으니까.
매일 HSK 자격증 (중국어 버전의 토익 시험)을 위한 교재로만 공부하다가 오랜만에 구입한 회화 교재였다. 회화 연습을 하려는 생각은 없었다. 그 교재는 중국어 받아쓰기 용이었다. 나는 지금 HSK 시험에 포함된 듣기 독해 쓰기 영역 중에서도 쓰기 라는 거대한 장벽 앞에 매일 좌절하고 있는 중이다. 정말이지 한자는... 눈으로 그 모양과 뜻을 외우기도 벅찰 노릇인데 글자를 통째로 기억해서 백지에 옮겨 쓰는 건 나에게는 무리다.
다행이도 나는 중국어 글자를 익히는 가장 좋은 방법을 알고 있다. 바로 받아쓰기이다. 적당한 회화 책을 골라서 우선 텍스트를 완벽하게 독해하고, 모르는 단어와 표현들을 익힌 후에 바로 받아쓰기에 돌입하는 방식이다. 처음에는 들리는 내용 중 절반 밖에 쓰지 못할테지만, 여러 번 반복하다 보면 어느 새 지문 하나를 완벽하게 받아쓸 수 있게 된다. 이 방식에 확신을 갖게된 건 대학교 3학년 때 중국에 어학연수를 갔을 때였다. 마크였던가 올리버였던가 영국에서 온 친구였는데, 6개월 동안 이 방법을 꾸준히 활용해서 중급에서 최상급까지 수준을 올렸다. 나는 뒤늦게 이 공부법을 전수받아 한 달 동안 시도했는데 나 스스로도 쓰기 실력이 크게 향상되는 걸 체감했다.
그러니까 그 교재는 책의 구성부터 텍스트의 최신성, 난이도, 지문의 길이까지 받아쓰기 용도로 완벽했다. 나는 혼자 노래를 흥얼거리며 책의 첫 장을 폈다. 새로운 교재를 시작할 때는 아무래도 들뜨기도 하고 의욕도 평소보다 타오르고는 하는 법이니까. 그리고 책 뒷표지에서 MP3 파일을 다운받을 수 있는 앱의 정보를 확인해서 핸드폰으로 다운로드받았다.
드디어 첫 번째 회화 지문을 재생하고 일 분도 안되었을 때, 공공 안전 경보 문자가 도착하며 핸드폰이 울렸다. 바로 문자를 닫고 자동으로 정지된 MP3 파일을 다시 재생했다.
헐. 이게 뭐야?!
음성 파일은 다시 맨 처음부터 재생되고 있었다.
애초에 음원의 재생(Play)과 정지(Stop)밖에 지원되지 않는 미디어 플레이어였다.
이 플레이어에선 음성을 한 번 재생하면 무조건 끝까지 들어야한다. 언제든 멈추면, 파일은 맨 처음으로 돌아가서 다시 재생한다. 요새 보기 드물 정도로, 말도 안되게 형편 없이 만들어진 앱이다.
이건 좀 너무한 거 아닌가요?
이 교재로 공부하려면 정말 모 아니면 도다. 두 페이지를 꽉 채운 텍스트를 처음부터 끝까지 끊김 없이 들으며 실시간으로 모든 내용을 받아써야 한다. 그러나 내가 동시통역사는 아니니 이 교재는 결국 아무 쓸데도 없다.
이 참에 내가 소유하고 있는 다른 출판사의 MP3 앱들을 확인했다.
내가 현재 HSK 6급 종합문제지와 단어장으로 사용하고 있는 B 출판사의 미디어 플레이어는 재생, 일시정지, 정지, 10초 뒤로 가기, 음소거 기능, 그리고 타임라인 바 기능이 있다. 음소거 기능은 도대체 왜 있는지 모르겠다. 타임라인 바는 꽤 짧다. 내 손가락 한 마디 반 정도 길이이다. 나는 이 미디어 플레이어로 30분 짜리 단어장 예문 듣기 기능을 매일 사용하는데, 타임라인 스크롤을 통해 원하는 지점에 커서를 딱 맞춰서 찾는 건 거의 불가능한 수준이다. 늘 1-2분 정도의 오차가 발생하기에 나는 차라리 원하는 지점 조금 앞에서부터 재생을 한 뒤에 이미 들었던 내용을 한 번 더 복습하는 셈 친다. 타임라인 바 오른쪽에는 음원 파일의 잔여 시간이 표시된다.
지금은 쓰지 않지만 책장 속에 꽂힌 C 출판사의 책을 꺼냈다. 책 안 날개에서 알려준 대로 앱을 찾아 다운로드 받았고, 바로 MP3 파일을 재생했다. 오, 이 출판사의 미디어 플레이어는 꽤 친절하다. 재생, 일시정지, 정지, 되감기, 빨리 감기 기능을 모두 갖추었으며, 이전 파일 가기, 다음 파일 가기, 해당 파일 반복 재생하기 기능까지 있다. 타임라인 바는 핸드폰 액정 가로 화면을 가득 채운다. 타임라인 바 양쪽에는 재생한 시간과 잔여 시간이 각각 표시되어 있다.
C 출판사의 책은 중국어 고급 회화 교재로는 바이블에 가까운 책이지만, 그만큼 오래되었다는 단점이 있다. 나는 이 책을 2008년에 구매했는데, 이후에 개정판이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다시 한 번 교재를 펼쳤다. 아쉬운 대로 이 책으로 받아쓰기 연습을 해야겠다.
차라리 외국어 교재마다 카세트 테이프가 함께 증정되던 때가 편했던 것 같다. 표지를 감싸던 두꺼운 비닐을 커터칼로 잘라 카세트 두 개를 꺼냈던 때가 있었다. 카세트 플레이어 상단의 되감기 버튼을 꾸욱 눌렀을 때 드르르르르 테이프 돌아가던 소리가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