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어 Rrr 발음(trilled R)을 정복하다.
드디어 나에게도 Rrrrr의 기적이 찾아왔다!
나도 이제 스페인어로 Perro(개)나 Carro(차)를 발음할 때 혀를 드르르르하게 진동하듯 떨며 말할 수 있다. 사실 가끔만 가능하고 어떨 때는 불가능하다. 언제 발음이 되고 언제 안되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혼자 연습할 때는 잘 되는 편인데, 화상 스페인어를 할 때 나의 콜롬비아 강사 앞에서는 잘 안된다. 오늘 나는 또 한 번 Perrrrro라고 발음할 수 있는 기회를 Pero라고 말하며 날려버리고 말았다.
처음 Rrrr 발음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된 건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로 선택했던 독일어 수업에서였다. 원래 독일어에는 스페인어와 같은 Rrrr 발음이 없다. 그런데 우리의 독일 원어민 선생님은 독일의 아주 작은 시골 마을 출신이었고, 흔치 않게 R 발음을 드르르하게 떨면서 발음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수업 초기에, 자신의 발음은 사투리 발음이니 우리 학생들은 꼭 R을 떨면서 발음하지 않아도 된다고 당부했다.
그러나 호기심 많은 학생들은 다 한 번씩 Rrrr 발음을 따라 해 보았다. 첫 시도만에 Rrrrrrrrrrrr를 길게 끌며 따라 하는 아이들이 있었고 그렇지 못한 나 같은 학생도 있었다. 이 발음이 참 신기하게도 되는 사람은 처음부터 잘되기도 하는지라, 발음이 되는 사람은 신이 나서 자랑하듯 시도 때도 없이 혀를 떨었다. 반면 발음이 되지 않는 사람들 중에는 금세 흥미를 잃은 사람도 있었고, 나처럼 오기가 생겨서 계속 연습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끝내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매번 의식적으로 혀를 앞뒤로 움직이며
'르, 르, 르, 르, 르'하고 끊어진 소리를 내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내 혀가 짧은 건가, 나는 거울 앞에서 혀를 길게 내밀어보기도 했다. 나 혼자서는 길고 짧음을 상대적으로 가늠할 수 없었다. 차마 엄마나 동생을 거울 앞으로 불러서 서로의 혀 길이를 비교해보자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도 다행이었던 건, 독일어 표준어에는 Rrrr 발음이 필요 없었다는 것이다. 머지않아 나는 Rrrr 발음을 포기했고, 대신 독일어 정통의 가래 끓는 듯한 'R' 발음에 집중했다. 독일어에서 Trei(3), Jahre alt(나이), Fahren(차, 자전거 등을 타다)을 발음할 땐 목 뒤에서부터 긁어서 'ㄱ' 소리를 내는 것이 포인트다. Trei 라면 '트라이'가 아니라 '트그흐아이' 정도로 발음한다고 보면 될까.
그렇게 Rrrr 발음에서 달아났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스페인어를 배우기 시작해 버렸다. 스페인어는 Rrrr 발음이 필수다. Pero와 Perro, Caro와 Carro의 의미가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나는 한 때 과감히 포기하기로 결심했던 그 문제의 발음에 다시 당면했다. 7월 말부터, 나는 시도 때도 없이 Rrrr 발음을 연습했다. 유튜브에서 'Spanish R Sound'로 검색해서 영상을 여러 개 시청했다. 내가 본 영상들 중에서 조회수가 가장 높은 영상은 6분 짜리였는데, 목과 혀의 구조를 설명하면서 R을 떨면서 발음할 때 혀가 입천장과 이빨 중간 위치에 닿아야 하며, 그 상태로 공기를 내뱉어야 한다고 알려줬다. 나는 한참을 혀로 입 안 위쪽을 매만지며 어디가 '입천장'인가 고민했다.
- 근데, 혹시 이 글을 보는 여러분은 혀로 정확히 입천장을 찾으실 수 있나요?
스페인어의 Rrrr 발음은 하나지만, 그 발음을 알려주는 유튜버들마다 비법은 천차만별이었다.
그중 나에게 가장 도움이 되었던 팁은,
Rrrr 발음을 하기 전에 Drrr 발음을 먼저 연습하라는 것이었다.
Rrrr은 아무리 해도 안됐지만, Drrr는 조금 비슷하게 흉내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덕분에 한 달 넘게 나는 스페인어의 모든 Rrrr 소리에 D를 붙였다. Perro를 Pedrro, Carro를 Cadrro로 발음해놓고선, 그래도 r이 조금은 떨리는 것 같다며 만족해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D가 없이도 Rrr만 발음할 수 있는 순간이 찾아오고야 만 것이다!
나는 나의 소소한 성취에 너무도 신이 나서 하루종일 싱글벙글하며 남편이 퇴근하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남편에게 다짜고짜 말을 걸었다.
- 오빠 오빠 이거 들어봐 봐. 아RRR.
남편은 갑자기 얘가 무슨 얘길 하는 거지 하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며 나에게 대답했다.
- 아RRRRRRRRRRRRRRRRRRRRRRR.
아, 남편은 스페인어로 안녕이라고 말할 줄도 모르고 숫자 1,2,3도 세지 못하지만, 선천적으로 Rrrr 발음은 타고난 복 받은 혀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이렇듯 나는 외국어를 공부할 때 발음에 목숨 거는 편이다. 아니, 목숨 건다고 말하기엔 내 영어 발음과 중국어 발음이 완벽히 네이티브 같다고 자부할 수는 없겠지만, 최대한 단어의 발음과 문장의 높낮이 (Intonation), 강조를 신경 쓰기 위해 노력을 많이 한다.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들은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할까(나는 노래를 잘 부르지 않기에 모른다). 춤을 잘 추는 사람들은 자꾸 춤을 추고 음악에 몸을 맡기고 싶어 할까(나는 춤도 잘 추지 못해 모른다). 내가 분명히 아는 건, 발음이 좋아질수록 해당 언어로 자꾸만 말을 하고 싶어진다는 것이다.
물론 발음이 외국어 구사의 전부는 아니다. 내가 유튜브에서 'Spanish R Sound'의 영상을 찾아볼 때, 그 밑에 달린 댓글들을 보며 알게 된 것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Rrr' 소리를 내지 못해 전 세계에서 각계 각국의 사람들이 이 영상을 찾아들어왔다는 사실이다. 한국어 사용자만 Rrr 소리를 내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아무리 연습해도 안 되는데 스페인어를 포기해야 하나요?' 댓글에는 'Rrr 발음이 안 되어도 괜찮아요. 어차피 문맥으로 다 알아들어요'라는 답글이 친절하게 올라와 있었다.
두 번째 사실은 그보다 더 흥미롭다.
"Me being a native Spanish speaker
: can't trill their Rs"
_ 저는 모국어가 스페인어예요
: 그러나 Rrr 발음을 하지 못해요. (A. P 씨)
의외로 스페인어 네이티브 구사자들 중에서도 Rrr 소리를 못 낸다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나는 할 수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