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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의 Sep 23. 2020

중국어 공부하다 분노한 이유

한 중국어 쓰기책의 배신


어제 중국어 공부를 하던 중 내 눈을 의심하게 하는 일이 있었다. 처음 나는 그 예문을 중국어로 읽고, 

'음. 내가 잘 못 해석했나?' 싶었다. 그런데 한국어 해설도 마찬가지였다.

한 남자가 사고로 두 귀를 잃어서 의사가 그에게 이식 수술을 해주었다. 한 달 후 그가 의사를 찾아와 원망하며 말했다.

"선생님께서 제게 이식해주신 귀가 여자의 것이죠?"
"맞아요! 그런데 어떻게 하셨죠?"
"무엇이든지 다 들리지만, 아무것도 이해가 안 가요!"


HSK 6급의 쓰기 문제는 예문으로 읽은 내용을 기억한 후 요약해서 다시 쓰는 방식이다. 위 문제의 모범 답안은 아주 태연하게 '이 남자는 무엇이든 다 들리지만 아무것도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을 농담으로 풀어내고 있다'라며 끝맺고 있다. 


... 이 책의 초판은 2011년에 발행되었다. 9년 전이니 지금만큼 젠더 의식이 없었을 때라고 생각하고 어렵게 눈을 감아주기로 한다, 하더라도 내가 가지고 있는 교재는 2019년 11월에 찍힌 5쇄이다.


나는 무개념 예문에 당황하고 교재를 뒷부분을 한 페이지씩 넘겨보았다. 사실 미리 예문을 찾아보는 건 공부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일이다. 문제를 풀기 전에 해석부터 찾아보는 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 교재에 대한 분노에 타올라 그런 거 따위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몇 페이지 넘기지 않아 나는 또 하나의 이해되지 않는 예문을 찾을 수 있었다.

한 남자가 그의 아내와 해변을 산책하고 있는데, 맞은편에서 아리따운 아가씨가 걸어오자 남자가 작게 말했다. "코 진짜 예쁘다! 당신 얼굴에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아내는 이를 듣고 불만스럽게 미간을 찌푸렸다. 잠시 후 또 아리따운 여자 한 명이 들어오자 남자가 조용히 말했다. "입술 진짜 예쁘다! 당신 얼굴에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내는 또 입을 삐쭉거렸다.
이때, 한 맹인이 걸어오자 아내가 얼른 말했다. "저 눈 얼마나 좋아, 당신 얼굴에 있었으면 좋겠네."

위의 예문, 혹시 저만 불편한 건가요? 


교재는 뒤로 갈수록 예문이 점점 길어진다. 내가 찾아낸 마지막 문제의 예문은 이런 내용이었다.

진짜 갈수록 가관이다...

 (그대로 가져오기에는 지문이 길어 일부만 발췌해왔다.)

여 간호사 장판은 사람들에게 '뚱땡이 장'이라고 불려서, 다이어트는 오랜 기간 그녀가 분투하는 목표가 되었다. (그리고 그녀가 에어로빅, 식이요법, 다이어트 차, 한방 다이어트 등 다양한 방법을 시도했지만 소용이 없었다는 내용이 이어진다.) 그녀는 여전히 뚱뚱해서 종일 고민하고, 심지어 자신이 너무 뚱뚱해서 남자친구가 떠나지 않을까 걱정했다.

어느 날 그녀가 남자친구와 영화 볼 약속을 잡으려고 전화를 했는데,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는 그의 회사 동료였다. '장팡이군요. 샤오왕은 오늘 쉬는 날이에요. 아는 여자랑 공원에 놀러 간다던데......" 장팡은 그 말을 들고서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녀는 계속해서 며칠 동안 밥도 넘어가지 않고 잠도 오지 않아서 많이 핼쑥해졌다. 엿새 째 되는 날, 샤오왕이 와서 그녀의 침대 머리맡에 장미꽃 한 다발을 놓고는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는 조용히 "실연 다이어트가 가장 좋은 다이어트 법이야."라고 말했다.


부디 이 이 장면 직후에 장팡이 남자 친구인 샤오왕을 한 대 세게 때린 후 확 차 버리고, 뚱뚱하든 날씬하든 있는 그대로의 그녀를 사랑해주는 남자를 만났으면 좋겠다.




요새 출판되는 일반 서적들 중에서 이렇게 무개념한 이야기를 그대로 싣는 건 그다지 흔히 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외국어 교재를 공부하다 보면 정말이지 별 이야기가 다 있다. 


보통 중국어 HSK 교재에 실린 예문에는 성공담이 많다. 요령 피지 않고 부지런히 성실하게 일하면 언젠가는 성공할 수 있다는 이야기들은 이미 너무 많이 읽어서 식상해진 상태다. 보통 이런 식이다. 세 형제가 있고, 아버지는 죽기 전에 꼭 한 가지 과제를 공통으로 내준다. 첫째와 둘째는 더 효율적인 방법을 찾다가 (지문에서는 '꾀를 낸다'라고 표현한다) 결국 망하고, 막내는 아버지 말씀 그대로 충실하게 따른 덕분에 결국에는 혼자 성공한다. 


이런 진부한 교훈까지는 그냥 그러려니 했다. 그러나 유머를 빙자한 위의 시대착오적인 (저런 걸 허용하는 시대가 우리한테 있었다는 것이 너무 안타깞다) 예문에는 역시 화가 난다.


문제는 이 교재를 대체할 수 있는 교재가 시중에 몇 개 없다는 상황이다. (종합서는 몇 개 나와 있지만, 내가 취약한 쓰기 영역만을 이렇게 집중적으로 다룬 교재가 없다). 


나에게는 지금 세 가지 선택지가 있다.


1. 지문의 내용과는 상관없이 계속 이 교재로 공부한다.

2. 이 교재로 공부하되 마음에 들지 않는 지문은 넘어간다.

3. 이 교재를 버린다.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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