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불식 전기 계량기 Pay-as-you-go meter
렌트한 집은 전기를 충전해서 써야 했다. 나는 그게 뭔지도 몰랐다. 남편이 충전했다고 하면 "아, 전기가 들어오는구나" 했지, 뭘 어떻게 충전하고 얼마가 드는지 물어보지도 않았다.
어느 날, 해가 쨍해서 딸을 데리고 근처 공원에 갔다. 그런데 해가 빨리 진다는 걸 깜빡했다. 조금만 더 놀다가 집으로 돌아가자고 했던 게 길이 이미 깜깜해져 있었다. 길에 사람들도 없고 아이를 데리고 집까지 전력을 다해서 갔다. 허겁지겁 집에 도착해서 열쇠를 돌리고 스위치를 눌렀는데 불이 켜지지 않았다. 남편이 전기를 충전한다는 걸 깜빡했나 보다.
집 안은 너무 어두워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움직일 수 조차 없었고, 어린 딸과 함께 계단에 앉아서 하염없이 기다리기만 했다. 어두워도 어쩜 그리 어두울까? 빛 하나 들어오는 게 없었다. 이 어둠은 그냥 불 꺼진 집이 아니라, 마치 내 삶을 꺼버린 듯했다. 사실 나는 이 어둠을 핑계로 더 깊고 깊숙한 곳을 찾아 숨고 싶었다. 혼자 잠시 그런 생각에 잠기다 옆에 딸의 인기척을 느꼈다.
딸은 무서워했고, 나는 두려움을 들키면 안 될 것 같아 밝은 가면을 썼다. 억지로 웃으며 딸에게 이야기를 건네고, 목소리 톤을 높였다. 이런 에너지가 너무 힘든 시기였다. 숨을 가다듬고 다시 한번 내 상태를 끌어올렸다. 목소리 톤이 높아지고 아이가 긴장되지 않게 노력했다.
어둡고 추운 집에서 딸을 안고 남편이 빨리 오기를 기다렸다. 남편은 학교에서 하던 일을 멈추고 돌아왔다. 가방을 내려놓고 근처 200m 떨어진 CO-OP(The co-operative)에 가서 전기를 충전해 왔다. 왕복 10분이면 충분한 거리의 기다림은 몇 시간처럼 길게 느껴졌었다.
마침내 충전키를 계량기에 꽂자 불은 환하게 켜졌다. 그제야 살 것 같았다. 불만 켜졌을 뿐인데 이미 어둡고 차가웠던 내 마음은 다 녹은 듯했다. 전기가 이렇게 소중하다는 걸 그날 처음 몸소 알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고지서만 받고 내가 얼마나 썼는지 숫자로 확인했는데, 단전을 겪어보니 전기는 무조건 아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로 나는 정말 귀신같이 불을 끄고 살았다. 그리고 아낄 수 있는 전기는 무조건 절약한다는 생각이 몸에 배였다.
불만 꺼진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냉장고까지 모든 전기가 차단된 상태였다. 집에 있던 식자재도 녹아 있었고, 전기밥솥에 있던 밥도 차갑게 식어 있었다. 이런 날은 누군가 따뜻한 수프 한 그릇을 건네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간절했다. 몸도 마음도 고단했나보다.
추위에 떨다가 갑자기 배가 고파 징징거릴까봐 딸아이를 위해서 욕조에 따뜻한 물을 가득 받았다. 물속에서 놀다 보니 아이는 조금씩 웃음을 되찾았고, 나 역시 긴장이 풀리며 마음 한편이 따뜻해졌다. 밝은 빛이라는 게 참 소중하구나. 그 사이 나는 저녁 식사 준비를 할 수 있었다.
당시 한 번에 50파운드를 충전하면 추운 겨울에도 2주 가까이 사용했다고 한다. 아마 그날도 딸을 위해 데운 따뜻한 물이, 충전한 전기를 많이 삼켰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