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스 시내 구경 - 영국생활 12

언젠가 다시 걷고 싶은 거리

남편과 딸이 학교에 가고 기운을 차린 날은 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갔다. 당시 버스 요금은 2.5파운드였고, 환율이 1800원 이었으니 왕복 버스 요금만 해도 9천 원 가까이 들었다. 마트에서 과일이나 채소, 고기는 한국에 비해 꽤 저렴했는데 환율 체감은 정말 어마어마했다.


우리 집은 시내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당시 렌트비를 감당하려면 어쩔 수 없이 저렴한 집을 찾아야 했고, 결국 시내에서 벗어난 곳으로 이사할 수밖에 없었다. 단기로 온 유학생들은 대부분 시내에서 집을 구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 선택이 더 현명했던 것 같다. 그래도 우리는 더 저렴한 가격에 넓은 집에서 아이와 함께 지낼 수 있었던 점이 좋았다.


집 앞 1분 거리에 다행히 버스 정류장이 있었다. 그 버스를 타고 30분쯤 가면 바스 시내에 들어갈 수 있었다. 중앙 정류장(Bath station)에 내리면 시내로 바로 연결이 되었다. 그래서 갈아탈 필요 없이 한 번에 바스(Bath)의 풍경을 만날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영국이라는 나라를, 바스라는 도시를 구경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시내에 나갔을 때 내 차림은 다소 가벼웠던 것 같다. 그렇다면 긴 가을과 겨울, 초봄을 다 지나고 드디어 늦봄이 되어야 몸을 움직일 수 있었던 셈이다. 백화점 앞 쇼윈도를 지날 때, 불러 있던 내 배가 유리창에 또렷이 비쳤던 장면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 기억으로 미루어 보아, 아마도 출산일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을 것이다.


정류장에 도착해 오프라인 상점들이 늘어선 32스톨 스트리트(32 Stall street)를 따라 5분쯤 걸으면, 웅장한 로만 바스(Roman baths)가 눈앞에 나타난다. 두꺼운 기둥으로 받쳐 세운 건물은 그 자체로 역사의 무게를 품고 있었다. 영국이지만 진짜 로마에 있는 듯한 실감이 들었다.


아이를 데리고 남편이 공부하던 시절이라, 내게 로만 바스의 입장료는 쉽게 살 수 있는 금액이 아니었다. 나 혼자만 들어가서 봐도 되는데, 왜 꼭 셋이 함께 가서 봐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그리고 그때의 나는 처음 겪는 외국 생활 속에서, 이곳에 영영 계속 살 줄만 알았다. 그래서 언젠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갈 수 있는 곳이라 여겼다. 훗날 지금까지도 들어가보지 못한 한으로 남을 줄은 상상도 못했으니깐. 그렇게 1년을 살면서도 정작 로만 바스 안에는 한 번도 들어가 보지 못한 채 바스를 떠나야 했다.


바스 시내에는 아기자기한 상점들이 즐비해 걷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특히 눈길을 끈 것은 간판이었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화려한 네온사인은 없었다. 백화점이나 옷가게, 화장품 가게등 상점들이 플라스틱 간판으로 많이 사용했지만, 글씨 간판들도 많았다. 마치 60년대 상점가를 거니는 듯한 단순한 글자 간판들이 거리를 채우고 있었다. 헤어숍, 의상실, 정육점등 페인트로 직접 쓴 손글씨 간판은 클래식하면서 전통을 느낄 수 있었다. 60년대 영화에서만 보던 거리를 걸으며 그제서야 또 내가 영국에 있다는 사실이 다시 와닿았다.


거리에는 노숙자들도 많았는데, 공통점은 하나같이 큰 강아지를 데리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처음에는 강아지에게도 지원금이 나온다고 들었지만, 실제로는 정부에서 직접 돈을 주는 것이 아니었다. 대신 여러 자선단체와 동물보호단체에서 무료로 사료나 진료를 지원해 준다고 했다. 그래서 노숙자들에게 강아지는 단순한 동물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동반자이자 삶을 지탱해 주는 가족 같은 존재로 보였다.


상점들은 파스텔톤의 민트, 하늘색, 흰색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참 예뻤다. 거리를 걷다 보면 옷 잘 입은 젊은이들보다 멋쟁이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더 자주 마주쳤다. 가을 트렌치코트에 흰 머리칼을 날리며 체크무늬 목도리나 숄을 두르고, 멋진 핸드백을 들고 힐을 신은 할머니들은 흔한 풍경이었다. 그들은 언제나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카페나 레스토랑에서 즐겁게 대화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지금 나는 다시 바스를 여행할 계획을 준비하고 있다. 그때 함께 걸었던 공원도 다시 가보고 싶고, 결국 들어가 보지 못했던 로만 바스에도 이번에는 꼭 들어가 볼 생각이다. 짧지만 깊게 남아 있는 바스의 시간들을 다시 마주할 날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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