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은 그 공간의 분위기가 될 수 있다.
나는 내가 감정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성적인 생각이 자라기 전에 감정적인 생각과 행동을 먼저 터득했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이성보다 감정을 먼저 터득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감정은 ‘화난다.’, ‘즐겁다.’, ‘슬프다.’ 등 본능적으로 일어나는 감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배움으로 인해 이성적인 생각, 옳거나 잘못됐다는 판단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성적인 생각이 자라나면서 사람은 자신의 환경에 영향을 받아 감정적인 사람인 지, 이성적인 사람인 지 결정된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나는 감정적이다. 나의 감각에 중점을 두고, 타인의 기분에 중점을 두고 일을 처리하려는 사람이다. 어떤 일을 할 때 ‘내가 이것을 하면 상대가 좋아할까? 언짢아할까?’를 생각한다. 그래서 때로는 할 수 있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타인의 감정에 피해를 줄까 모른 척을 하거나, 하지 않는 경우도 더러 있다.
내가 감정적인 사람이라서 타인의 감정에 더욱 신경을 쓰게 되는 것 같다. 타인의 감정을 신경 쓰다 보면 거기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간혹 그 사람의 감정에 물들어 버리는 경우가 생긴다. 특히, 친밀도가 높을 경우 그 횟수가 많아서 그들의 고단함을 듣는 것이 때로는 싫었을 때가 있었다. 그들이 내게 자신의 고단함을 말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예상할 수 있다. 일단 말을 하면서 안에 가득 찬 감정을 풀고 싶고, 공감이나 위로를 받고 싶다는 것이 그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내게 하는 이유는 내가 잘 들어주거나 공감이나 위로를 잘해주든가 그런 이유일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려고 했었다. 하지만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힘들어지던 때가 있었다. 지금의 와서 생각해 보면 내 안에서도 풀리지 않는 감정들이 많이 쌓여있어서 그랬겠지만 그들의 고단한 이야기가 나를 더욱 지치게 만드는 날이 늘어났다. 그래서 어느 시점부터는 그들의 이야기를 자세히 알려고 하지 않았다.
정신건강의학과를 다니면서 약을 먹고, 상담을 받으면서 꽤 오랜 기간 지쳐있던 나의 감정은 슬슬 활기를 찾았다. 우울하거나 기분의 깊이가 낮은 날보다 즐겁고 높은 위치의 기분을 유지하는 날이 늘어났다. 하지만 가끔 나의 기분은 비교적 안정적인 위치에 있다가도 낮아지는 경우가 생겼다, 함께 일하는 동료가 일을 하면서 생긴 자신의 실수를 끊임없이 자책하거나 자책하면서 또 다른 실수를 만들어내고, 그로 인해 자신의 감정을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 가감 없이 비출 때였다. 그의 감정이 내게 그대로 전달되었다. 그를 신경 쓰고, 내 기분을 신경 쓰기 시작하면 나는 더욱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래서 생각했다.
‘나는 타인의 감정에 예민할 뿐 아니라, 전염도 잘 되는구나.’
내가 타인의 감정에 예민한 사람이라고 해도 전염되지 않는다면 나는 그리 힘든 시간을 보내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예민해서 상대가 기분이 언짢음을 알아차렸다고 해도 거기서 끝이었다면 괜찮았을 것이다. 그러나 상대의 기분은 때로는 그 공간의 분위기가 되고. 나는 그 분위기에 퍼져있는 ‘언짢음’이라는 세균에 전염된 것이다. 감기를 앓고 있는 사람 옆에 종일 있어도 감기에 걸리지 않는 사람이 있는 반면, 잠깐 옆에 있었는데도 감기에 걸리는 사람처럼 말이다.
한 사람의 감정이 분위기가 되고, 분위기는 때로는 타인이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직접 느낀 뒤로는 감정 표현을 하는 것이 조금은 조심스러워졌다. 좋은 감정은 더 표현하려고 하지만 개인적으로 얻은 좋지 못한 감정은 조심해 가면서 표현하려고 한다. 내가 누군가에게 ‘피곤한’ 사람은 되기 싫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