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
도시를 떠나 농촌 유학으로 나주에 오면서, 종종 들녘을 감싸는 안개 낀 아침을 맞이합니다. 아이들을 태운 스쿨버스가 안갯속으로 사라지고 나면, 그 뒤에 남겨진 고요함이 제 발걸음을 잠시 멈추게 합니다.
눈앞의 모든 것을 흐릿하게 만드는 안개는, 아이러니하게도 그 속에서 오히려 더 또렷한 무언가를 발견하게 합니다.
도시에서 벗어나 나주로 농촌유학을 결심한 건 어디까지나 아이들을 위한 선택이었습니다. 그러나 낯선 길 위에서 시작된 이 여정은, 뜻밖에도 제게도 새로운 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아이들 첫 등교가 있던 며칠 뒤, 교장 선생님과 교감 선생님께서 저를 찾아오셨습니다. 숙소 바로 앞에 있는, 위탁 운영 중인 농촌 마을 학교를 소개하고 싶다며 시간을 내주셨지요. 후일담처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아이 둘만 데리고 이곳에 온 저를 위해 어떤 방식으로든 도움이 되고자 마련한 자리였습니다. 그날의 따뜻한 손길은 오래도록 제 기억에 남습니다.
그 만남 이후, 저는 왕곡초등학교의 도서관에서 아이들과 함께하는 문화체험 봉사를 제안받았습니다. 단순한 도서관 봉사정도로만 생각하고 있던 차에, 제 전공을 살려 직접 문화체험을 진행하게 되다니요.
이건 마치 조용히 무대 뒤를 지키던 스태프가, 갑자기 조명을 받으며 무대 한가운데에 서게 된 기분이었습니다.
평소 해보고 싶었던 미술지도를 우리 아이들이 다니는 초등학교에서 할 수 있다니, 저에게 참 설레는 일이었습니다.
제 전공인 만화와 미술을 엮은 50분 남짓의 수업을 주 4회, 점심시간마다 도서관에서 진행하며 아이들에게 다양한 미술체험을 제공했습니다.
점심시간이 되면 도서관으로 달려오는 아이들, 조심스레 구경만 하다가 결국 용기를 내어 참여하는 아이, 미술을 좋아해 집중하는 아이, 도장미션과 작은 선물에 이끌려 어쩔 수 없이 참여하는 아이. 아이들 저마다의 모습 속에서 저는 전교생 하나하나의 이름과 성격, 성향을 익혀갔습니다.
책을 읽고 주제에 맞는 활동을 펼치거나, 계절에 어울리는 주제를 함께 나누고, 재활용품에서 아이디어를 찾아 미술로 풀어내며 저 나름의 바쁜 나날을 보냈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일상의 이벤트처럼 이어진 이 수업이 아이들에게 생활 속 예술의 작은 숨결처럼 스며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저 아이들의 마음속에 예술적 감성이 젖어드는 마중물이 되길 바랐습니다. 예술이 아이들의 삶 한 구석에 ‘해도 되는 일’, ‘즐거운 일'로 남아주길 말입니다. 그리고 왕곡초 아이들의 성장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면 감사한 추억이 되겠거니 말이지요.
하지만 그 시간이 오롯이 이곳 왕곡초 아이들만을 위한 것이 아님을 어느 순간 깨달았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나누는 순간마다, 아이들이 자라는 옆에서, 저 역시도 함께 자라고 있던 것입니다.
안갯속에서 길이 드러나듯, 뜻밖의 기회는 그렇게 제게 다가왔습니다. 작은 시작이었지만, 이 길 앞으로 어떤 풍경으로 이어질지는 아직 알 수 없었습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제가 이곳에서 아이들과 함께 하면서 조금씩 풍성해지고 단단해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저는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안개 낀 아침마다 찾아오는 고요는, 앞을 흐리게 하는 안개가 아니라, 새로이 피어날 수 있는 조용한 초대였습니다. 그 초대는 우리 아이들과 함께 이곳에 서서히 젖어들 기회를 제게 열어주었고, 저는 그 속에서 다시 피어나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웃고, 함께 그리며, 저도 다시 꿈을 키우게 되었습니다. 그 꿈은 이곳에서, 아이들과 함께 자라나는 또 다른 나의 모습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