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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밀밭의 사기꾼 Jun 06. 2018

그래도, 편집자라서 다행이야

퇴근 후에 술 한잔 같이 마실 만한 사람이 없는 회사에 더는 다니기 싫었다. 처우도 나쁘지 않았고 부당한 일도 겪지 않았으며 열심히 책만 만들면 되었고 동료들도 모두 너그럽고 좋은 사람들이었는데 어째서 고작 그런 이유로 사표를 냈을까. 그 생각을 하면 할수록, 내 퇴사의 이유가 정말 그것이었을까 혼란에 빠지곤 했다. 


전에 다녔던 또 다른 출판사는 직원들을 ‘식구’라고 부르며 부지런히 회사뽕(?)을 주입하던 회사였다. 큰 회사였던 만큼 부서마다 하는 일도 너무 다르고 사업부도 너무 다양했지만 우리는 모두 한식구라는 이름으로 자주 묶여졌다. 심지어 출판사가 아닌 전혀 다른 계열사까지 잔뜩 짊어진 이 거대 회사의 인사 담당자들은 창업주의 뜻에 따라 이들을 모두 식구라고 대충 버무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단합대회니 워크숍이니 애사심 으쌰으쌰 하는 행사가 반복될 때마다 온몸의 솜털까지 다 일어나 파르르 뒤틀리는 것 같았다. 저, 그냥 일을 좀 하면 안 되겠습니까. 그리고 월급을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퇴근하고 술 마실 사람, 그러니까 마음을 나눌 동료가 없는 것도 싫지만 같은 회사에 다닌다는 이유로 무작정 묶이기는 싫은 나란 인간. 또 우리는 그저 우연히 같은 소속을 갖게 되었을 뿐, 그것 자체로 ‘우리’가 될 수는 없다고 경계하면서도 업무 이외의 또 다른 연결고리를 끊임없이 갈망했다. (이봐, 대체 어쩌라는 거야)


흔히들 회사에 ‘공공의 적’이 있을 때 동료들과의 친목이 굳건해진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게 다져진 동료애는 쉽게 지친다. 모이면 공공의 적을 규탄하기 바쁘고 그 적으로 인해 힘들고 괴로운 각자의 감정들이 우르르 몰려왔다가 허망하게 증발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한마디로 회사 욕, 상사 욕을 하며 쌓은 우정은 뒷담화의 대상이 사라지는 순간 함께 사라진다. 나 역시 그렇게 공허하게 날아가버린 우정이 한무더기였다. 


그런데 한 출판사에서 만난 몇 명의 후배, 동료, 선배들과 회사가 아닌 곳에서 재미있는 일을 해보자고 의기투합한 적이 있었다. 그 재미있는 일이란, 만들고 싶은 책을 함께 만들어보자는 것이었는데 모두가 현직 편집자인 주제에 취미로 또 책을 만들어보자니 이건 대체 뭔 소린가. 


우리도 여느 회사원들과 마찬가지로 모이면 회사 욕, 만나면 상사 뒷담화를 나누는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경쟁하듯 성토대회를 열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결국 책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이었다. 만들고 싶은 책, 동료가 만든 책, 내가 만든 책, 남의 회사 책, 부러운 책, 실망한 책, 내가 만들었다면 이렇게 저렇게 만들었을 책, 망한 책, 좋은 책, 숨 쉴 틈 없이 읽어버린 책…. 그러다보니 이 만남은 때론 독서모임이 되기도 했고 급기야는 수다로 쌓아올린 아이디어와 욕망들을 우리가 직접 책에 담아 만들자고 마음을 모아버린 것이다. 


우리는 한 회사에서 (아마도 우연히) 만났고 소속된 팀도 제각각이었으며 종국에는 모두가 그 회사를 퇴사해버렸고 각각 다른 회사로, 다른 업으로 흩어졌지만 우리에겐 공간이 있었다. 언제 어디서든 책을 이야기할 마음들이 늘 거기에 있었다. 회사는 우리를 통제하기 편한 덩어리로 묶으려 애썼지만 결국 우리를 묶어준 것은 당연하게도 애사심도, 소속감도, 단합대회도 아니었다. 소속이 어디든, 본업이 무엇이든, 책 이야기를 함께 나눌 수 있다면 우리는 누구와도 ‘우리’가 될 수 있었다. 그런 순간에 나는 편집자가 되길 참 잘했다고, 책 만드는 사람으로 살 수 있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바랐던 ‘퇴근 후 술 한잔 할 동료’라는 것의 정체가 바로 이것이구나, 싶었다. 


야심차게 마음을 모았던 책 만들기 프로젝트는 물론(?)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언제라도 또 다시 재미있는 일을 벌여보자! 외치고 마음만 모았다가 스르륵 없던 일이 되어도 좋았다. 모두가 같은 마음으로 ‘재미있는 일’의 내용을 상상하고 아이디어를 던지고 프로세스를 꾸려보는 과정은 그저 즐거웠고 그것은 다시 직업인으로서의 에너지가 되었다. 여전히 얼굴을 맞대면 술잔부터 부딪치고 왁자지껄하게 근황토크만 잔뜩 이어가곤 하지만 우리는 언제라도 다시 “그 책 봤어?”로 돌아온다. 


편집자들이야말로 진정한 덕업일치를 이룬 사람들일지도 모르겠다. 회사 동료들과 함께 모여 덕질(?)을 할 수 있는데 그 덕질의 대상이 책이고 생계를 잇게 해주는 본업이 바로 그 책을 만드는 일이라니. 어쩐지 한없이 마음이 넓어지고 만사에 감사해야만 할 것 같다.


일러스트: 손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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