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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 Oct 06. 2020

영국뽕 이야기

안녕 애들아!    

 

오늘은 ‘당연한 것에 대한 고마움’이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해볼까 해요. 사실 이러한 감정은 우리가 특별한 노력을 기울지 않으면 참 얻기 힘든 것 같아요. 하루하루 일상이 반복되다 보면 처음에는 고마웠던 마음이 들었던 것들도 점점 무뎌져 당연한 것으로 느껴지고, 결국 부정적인 것이 보이기 시작해 단점만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지는 것 같아요. 여러분들도 요즘 시간이 흐르면서 부정적인 생각이 늘어난다고 말하는 것을 보니 인간의 타고난 경향성 같기도 해요. 사실 샘이 그동안 담임 반을 바라보는 시선이 그랬어요. 샘은 금사빠(?)라 학기 초에는 여러분이 마냥 귀엽고 고맙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우리 반 아이들 참 착하고 괜찮아, 1년 감사하게 보낼 수 있겠다고 늘 좋아하죠. 하지만 몇 주만 지나도 아침 조회 들어가는 게 시큰둥한 일상으로 느껴지고 여러분을 보는 표정도 덤덤해지죠. 뜻대로 안 되는 학생도 많아지고 슬슬 불만이 쌓이기 시작하면서, 어쩔 때는 우리 반에 꼴 보기 싫은 학생이 왜 이렇게 많나 하는 생각에 조회 자체가 부담이 돼요. 가끔 주말에 몇몇 학생들 단점만 생각하면서 혼자 화를 낼 때도 있는데, 순간 내가 왜 이러는지 깜짝 놀라기도 했죠. 아, 오해하지 마세요. 우리 반이 아니라 샘의 과거 일반적인 감정 흐름을 말하는 거예요.(ㅎㅎ)      


이런 마음이 들 때 3월부터 작성한 학생 기록지를 보면 다소 마음이 누그러져요. 생기부 학생 행동발달 사항 적을 때 참고하기 위해 짧게 누적해 기록하는 건데, 3월 각 학생들마다 칭찬과 고마움이 많이 적혀있어 좀 낯선 감정이 들어요. 같은 사람이 쓴 것 맞나 어색하죠. 하지만 제가 그동안 신선함과 고마움을 잊고, 별 거 아닌 단점 몇 개에 꽂혀 비합리적인 생각을 키워갔구나 깨닫게 되죠. 사실 아이들은 별로 달라진 것 없이 똑같이 학교생활을 하고 있는데 변한 건 제 마음과 시선이었죠.      


샘은 ‘당연한 것의 고마움’이라는 감정을 생각할 때마다, 이상하게도 머리에 박힌 일화가 하나 있어요. 참 특별할 것 없는 경험인데도 샘에게는 꽤 신선한 느낌을 주었나 봐요. 수업 중에 ‘영국뽕(?) 이야기’라고 몇 번 들려준 적 있는데 여기 다시 써볼게요.      


때는 바야흐로 샘이 대학을 졸업하고 큰 맘먹고 영국 여행을 갔을 때에요. 그동안 알바를 하면서 모은 돈으로 유럽 배낭여행을 결정하고 영국을 첫 번째 여행지로 정했죠. 샘에게 영국은 꿈의 나라였어요. 영문과를 다니면서 영국 영화, 드라마를 통해 영국 문화를 많이 접했고 동경하는 마음이 커졌어요. 영국 발음도 멋있게 들려 실제로 들어보고도 싶었죠. 축구 경기와 뮤지컬도 직관할 수도 있어 영국은 늘 0순위였어요.      


영국을 여행하는 내내 마치 ‘영국뽕’을 제대로 맞은 사람처럼 환희의 감정 그 자체였어요. 정말 모든 것이 신기하고 멋있어 보였어요. 영국의 상징인 이층 버스를 타는데 인사해주는 기사님도 매우 젠틀했고, 2층 맨 앞자리에 앉아 경치를 감상하는데 정말 지상 최고의 버스를 타고 있는 기분이었죠. 운전도 어찌나 신사적인지 우리나라 버스와 많이 비교된다고 느꼈어요. 길거리 건물들은 모두 유럽식 고풍스러운 건물들이었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패션이 몇 십 년은 앞서 보이는 것처럼 세련 넘쳤어요. 어쩌다 눈을 마주치면 눈인사를 하는 여유까지. 간판으로 정신없는 우리나라의 혼잡한 거리와 대비되면서 정말 유토피아에 온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비록 음식 값은 비쌌지만 모두 고급 레스토랑에 온 것 같은 기분을 느꼈어요. 늘 우중충한 날씨가 단점이라고 하는데, 비록 한 번도 태양을 본 적이 없고 늘 흩날리는 이슬비가 내렸지만, 마치 도시 전체가 가습기를 튼 것처럼 상쾌하게만 느껴졌어요. 순수한 기쁨에 싸여 피곤한지도 모르고 런던을 헤집고 다녔네요. 정말 ‘영국뽕’ 맞죠?     


사진 - 영국 2층 버스 모습


사건은 영국 여행 마지막 공항 가는 길에서 일어났어요. 아침 비행기라 새벽 일찍 일어나 공항 가는 이층 버스에 올라탔죠. 이른 새벽이라 샘이 첫 손님이었어요. 반갑게 버스 기사에게 인사를 건넸지만 무표정한 표정만 돌아왔어요. 아쉬운 마음에 조금이라도 새벽 아름다운 런던 거리를 눈에 담고 있었는데, 버스 기사님이 갑자기 동전 꾸러미를 동전 통에 세게 치기 시작했어요. 동전을 감싸는 종이가 잘 안 찢어져 신경질을 내며 세게 툭툭 쳤어요. 이번에는 영수증 종이를 카드 리더기에 넣는데 종이가 꼬이기 시작하자 신경질을 내면 던지더니 동전통을 발로 세게 차는 거예요. 동전 통이 살짝 깨졌고, 분이 안 풀렸는지 밖으로 나가 담배를 한 대 피우셨죠. 몇 분후 ‘Sorry’라고 여전히 멋진 영국 발음으로 샘에게 말하고 출발했죠.      


그 순간 영국에서 느꼈던 환희감이 무너지고, 이동하는 내내 운전기사의 표정을 보며 눈치 보기 시작했어요. 동시에 샘이 영국 여행 기간 내내 환희감에 둥둥 떠 있었다는 사실도 실감하게 되었어요. 나도 모르게 운전기사의 눈치를 보면서, 문득 뭔가 우울한 표정이 많았던 영국 사람들, 밤거리 위 경찰과 실랑이를 벌였던 청소년들, 유독 많았던 노숙자들이 생각의 수면 위에 떠오르기 시작했어요. 사실 노숙자들조차도 참 멋있다는 생각을 했는데 말이죠. 다시 보니 버스 운전도 우리나라와 별반 다를 것도 없었죠. 평범한 생활 세계로서의 영국이 천천히 인지되기 시작했어요. 뭔가 우리나라보다 전반적으로 발전된 느낌이어도 세상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새삼 돌이켜보게 되었어요. 작은 운전기사의 행동이 샘이 영국 사회에 씌운 환희의 베일을 산산이 부쉈고, 그 틈으로 질퍽한 삶의 세계를 여과 없이 비춰줬죠.      


이런 경험을 통해 다양한 감상을 느낄 수도 있지만, 샘이 느꼈던 감정을 가만히 복기해보면, 먼저 이렇게 멋진 이층 버스 운전자가 불행함을 느낀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어요. 우습죠? 아무리 세상에서 제일 유명한 버스여도 삶의 희로애락을 느끼는 건 당연한 것인데 말이죠. 하지만 샘이 느꼈던 환희의 감정이 너무 생생해서 지금 눈앞의 운전기사의 행동이 오히려 기괴하게 느껴졌죠. 그러면서 혹시 세상의 사람들이 일상의 반복에 지쳐 타성에 젖어버린 것은 아닌가, 그리고 나도 우리나라에서 그랬던 것은 아닌가 문득 느끼게 되었어요. 마치 운전기사가 오히려 나를 비추는 거울 같았죠. 분명 세상은 환희와 즐거움의 요소가 군데군데 손짓하고 있는데 허물만 밝히려고 한 건 아닌가 돌아보게 되었죠.      


사실 영국에 있으면서 커져가는 환희만큼 우리나라에 대한 환멸이 자라고 있었어요. 영국과 달리 간판과 쓰레기로 늘 혼잡한 도심, 출퇴근길 숨 막히는 지옥철, 삶의 낭만이 없고 자본의 욕망만 춤추는 사회 등 우리나라의 어두운 측면이 더욱 부각되었죠. 물론 외국 사례를 본받아 더 나은 우리나라를 상상하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지만, 내가 살고 있는 사회의 환희를 충분히 느꼈는지 돌아보게 되었어요. 나도 분명 세상을 티 없이 맑은 눈으로 마냥 즐기던 시절이 있었는데 어느덧 지쳐버려 부정적인 생각에 갇혀 버린 것은 아닌가 반성하게 되었죠. 비록 어른이 되면서 사회의 다양한 이면을 알게 돼 겪는 자연스러운 과정일 수도 있으나, 시선의 균형을 잃어버린 것 또한 사실이었죠.      


영국에서의 경험으로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 더 밝아지기 시작했어요. 버스 기사님이 더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나부터 주변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연습을 시작했어요. 합리적이지 않은 부정적인 마음이 들 때마다 영국에서 느꼈던 감정의 큰 낙폭을 상기하며 내 감정의 중추를 바로 잡으려고 노력했어요. 모든 것을 마냥 긍정하자는 대책 없는 낙관주의를 말하는 것은 아니에요. 한 때 가지고 있었던 원초적 호기심과 환희의 감정을 가슴 깊게 느껴볼 필요가 있다는 거예요.      


사진 - Young샘


예전에 해외 이민자들이 겪는 문화 적응과정 3단계에 대해 읽은 적이 있어요. 첫 번째는 ‘허니문’ 단계로, 마치 새로운 여행을 시작하는 것처럼 큰 자유와 기쁨을 느끼고, 문화를 열린 마음으로 수용하고 향유하는 단계라고 해요. 두 번째는 ‘문화 충격’ 단계로, 기존 문화를 그리워하면서 새로운 문화를 낯설어하고 거부하는 과정을 거친다고 해요. 마지막은 ‘문화 수용 및 적응’ 단계로, 시간이 지나면서 새로운 문화의 체계와 가치를 이해하고 긍정하면서 적응해나간다고 합니다. 샘이 여기서 흥미롭게 느낀 감정은 바로 맨 처음 ‘허니문’ 감정이에요. 비록 나중에 문화충격 및 적응 과정을 거치지만, 분명 새롭게 출발하는 세상은 환희의 감정을 느끼기에 충분했다는 점이에요. 세상은 사실 기쁨의 손짓이 가득한데 잠시 지쳐 망각했다는 샘의 발견과 통하는 게 있지 않나요?    

   

학기가 진행되면서 학업 스트레스 때문에 그런지 점점 친구들에 대한 불만과 험담도 조금 늘어나는 것 같아요. 3월 초 여러분의 생기 넘치는 표정이 다소 쳐지고 있는데, 혹시 내 옆의 친구가 옆에 있어주는 것을 당연하게만 생각하지는 않았을까요? 혹은 학교와 가정에서 주어지는 것들의 긍정적인 면을 애써 외면한 채 자꾸 흠집만 내고 싶은 건 아니었을까요? 샘도 우리 반 관찰 일지를 다시 꼼꼼히 보면서, 내 마음의 불균형을 깨닫고 다시 3월의 감정이 천천히 돌아오는 것을 느낍니다. 점점 기록이 줄어들었는데 다시 하나씩 발견해 기록해야겠다는 힘이 돌아오네요. 다시 보니 여러분은 더디더라도 노력하면서 발전하고 있었고, 여러분 나름의 방식으로 성장하고 있었더군요. 혹시 주어진 상황이 당연하게만 느껴지고 불만만 쌓인다면 여러분만의 기록 노트를 마음속으로 복기해보세요. 천천히 돌아보면 다시금 감사했던 기억이 떠오르게 되리라 믿어요.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 여러분이 성장했다고 믿어보세요. 성장과 발전이라는 긍정적인 생각 속에서 자라날 때 다시 우리 안 환희의 감정이 꿈틀거리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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