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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 Oct 19. 2020

충분히 탐닉해봐, 페미니즘

안녕 애들아!     


오늘은 다소 어려운 주제를 이야기해볼까 해요. 제목은 ‘충분히 탐닉해봐, 페미니즘’. 남학생 중에 벌써부터 얼굴을 찌푸리고 스킵하려는 학생이 느껴지는데 조금만 인내를 가지고 한번 읽어봤으면 해요. 최근 교직 사회에 있으면서 꼭 다룰 필요가 있는 주제라고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최근 여학생 사이에서 부쩍 관심이 많아진 것을 피부로 느꼈기 때문이에요. 소위 성평등 감수성이 높아졌고 페미니즘 이슈에 민감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어요. SNS를 통해 활발하게 페미니즘 이슈를 공유하고 의견을 교환을 하고 있으며, 쉬는 시간에서 심심치 않게 페미니즘 이슈에 대한 대화를 들을 수가 있었고, 수업 중 젠더 이슈인 주제가 나오면 더욱 눈이 초롱초롱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어요. 특히 미투 운동이 거세게 일어나고, 광역자치단체장들의 연이은 성추문과 낙마 사건이 발생하면서, 여러분들의 관심도 더욱 증가한 것 같아요. 물론 페미니즘 이슈에 관심 없는 여학생들도 많지만, 그 학생들 역시 SNS 여론 흐름에 귀를 열고 있고 심적으로는 공감한다고 생각해요. 이렇듯 페미니즘은 분명 10대 여학생들이 각자의 관심 정도만큼 둘러앉은 화젯거리라고 할 수 있어요. 여학생들의 관심이 높아진 만큼 남학생들의 반발도 커진 것이 사실이죠. 인터넷에서 페미니즘을 둘러싼 성별 전쟁(?)을 심심치 않게 보게 되는데, 여러분들도 한몫 가세하고 있을 거예요.      


더 이상 페미니즘은 학교 밖 이야기가 아니라 학교 안에도 깊숙이 침투하기 시작했어요. 대표적인 사례가 일전에 소개한 적이 있는, 문학 수행평가 작품에 대해 우리 반 여학생이 이의 제기한 일이에요. 유명한 근대 한국 단편소설이었는데, 남녀 차별적 내용을 담고 있으니 작품을 교체할 것을 적극적으로 주장한 사건(?)이었죠. 처음 겪는 일에 문학 샘께서는 적잖게 당황하셨어요. 궁금한 마음에 정말 그러한지 인터넷을 검색해봤는데, 소설의 성 차별성을 지적하는 글을 다수 발견할 수 있었어요. 결국 그 아이의 의견은 받아들여져 작품이 교체되었어요. 여러분의 관심이 높아졌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단적인 에피소드예요. 그리고 샘은 기특한 마음이 들었어요. 자신만의 믿음에 따라 논리적으로 샘을 설득해 여러분의 일상인 수업을 바꾼 사례니까요. 최근 이러한 경향을 보면서 샘의 대학 시절이 많이 떠올랐어요. 샘의 페미니즘 경험담으로 이 주제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해요.


샘이 페미니즘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영문과 ‘페미니즘 문학 비평’이라는 수업을 통해서였어요. 사실 평소면 절대 선택하지 않을 과목인데, 절대평가 과목이라 대부분 A학점을 준다는 소문에 소위 날로 먹을(?) 생각으로 수강하게 되었어요.(ㅎㅎ) 조금 부끄러운 과거인데, 당시 학점이 절박했던 것 같아요. 사실 수업을 듣기 전까지는 페미니즘에 다소 비판적이었어요. 페미니즘이 이분법적으로 남자를 적으로 몰고 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남자 입장에서 반감이 드는 것은 자연스럽다고 생각했죠. 요즘 시대에 남녀 차별이 어디 있나 하고 생각하면서, 토론 시간이 되면 샘의 솔직한 의견을 적극적으로 피력하리라 마음먹었죠. 실제 수업 초반에는 페미니즘을 비판하는 발언들로 토론을 이어갔어요. 하지만 반박하기 힘든 반론들로 벌집 쑤시듯 샘을 공격하는 집중포화 속에 샘이 비빌 공간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일단 수업을 조용히 듣기로 결정했어요.(ㅎㅎ)      


수업 초반에 들은 다양한 페미니즘 이론과 이슈들은 거부감 자체였어요. 생전 처음 들어보는 여성들의 분노(?)가 꽤 충격적으로 다가왔어요.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조금씩 공감 가는 내용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현실 속에 남녀 간 불평등 사례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사회 경제적인 측면에서 구조적 남녀 불평등이 엄연히 존재했어요. 사회적으로 높은 직책일수록 여성의 비율은 현저히 낮죠. 남성 정치인에 비해 여성 정치인의 수는 극히 적은데, 국회의원의 경우 전체 국회의원의 채 20%도 차지하지 않고 있죠. 국민의 절반이 여성이지만, 20% 이하의 비율로 과소 대표되고 있어요. 경제계의 차이는 더욱 컸어요. 우리나라 여성 CEO의 비율은 1% 남짓이죠. 회사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근접할수록 여성의 비율은 급감하게 돼요. 이를 유리 천장(Glass Ceiling) 현상이라고 해요. 충분히 역량을 갖춘 구성원, 특히 여성이 회사 조직 내에서 특정 직급 이상으로 승진하지 못하는 ‘보이지 않는 장벽’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말이에요. 결국 이러한 차이는 남녀 간의 임금 격차로 이어져요. 2020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발표에 따르면 남녀 임금격차의 비율은 32.5%로 OECD 국가 중 압도적 1위라고 합니다. 달리 말해 여성 임금이 남성 임금의 67.5% 수준으로, 남성의 수입이 100만원일 때 여성은 67만 5000원이라는 뜻이에요. 물론 구체적인 숫자를 모든 상황에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있겠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임금 차이를 부정할 수는 없죠. 이는 여성이 남성에게 경제적, 물질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구조로 이어지죠. 의사, 변호사 등 고위 전문직의 비율 역시 차이는 현저하죠. 그래도 우리나라는 여성 대통령도 배출하지 않았냐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사실 아버지 박정희라는 남성의 후광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예외적 상황이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출처 - 위키피디아


더욱 흥미로웠던 점은, 이렇게 사회 경제적 차원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남녀 간의 구조적 불평등이 마치 숨 쉬듯 존재한다는 사실이었어요. 평소 당연하게 여겼던 일상이 색다르게 보이는 순간이었어요. 그중 여성이 남성보다 훨씬 외모에 대한 압박이 심하다는 사실이 새삼 크게 다가왔어요. 미디어에 보이는 예쁘고 늘씬한 여성 이미지 일색은 자신의 신체를 끊임없이 부정하게 만들고, 일상적인 다이어트 강박으로 이어지게 해요. 특정 상황에서 화장하지 않으면 예의 없는 것이 될 수 있고, 여자 아나운서는 안경을 써서는 안 되죠. 물론 여성이 남성보다 외모에 신경 쓰는 것은 생물학적 차이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본인의 자발이라기보다 사회적 압력에 따른 암묵적 강요라면 권력 불균형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심지어 본인의 자발이라고 해도, 여성의 이상적인 외모를 강요하는 사회 속에서 성장한 여성에게 어디까지가 자발인지 그 경계가 모호하게 되죠. 이 외에도 일상생활에서 여성들이 온라인과 오프라인 상에서 성희롱, 성폭력에 암암리에 노출되어 있으며, 이에 따른 불안감으로 활동에 제약받는다는 점을 다양한 사례로 접하게 되었어요. 이렇듯 남자로 살면서 평생 경험하지 못한 여성으로서 느끼는 일상적인 불편함과 제약이 신선하게 다가왔어요.      


기존 문학 작품을 페미니즘의 관점으로 재해석하는 비평 이론들도 꽤 흥미로웠어요. 가장 충격적으로 다가왔던 것은 소위 ‘소설의 구조’에 대한 비판이었어요. 문학 시간에 한 번쯤은 들어봤던 내용일 거예요. 바로 소설은 일반적으로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의 구조를 따른다는 점이죠. 학창 시절 각 단계의 특징을 열심히 외웠던 기억이 나네요. 마치 등산하는 것처럼 사건이 점점 고조되다가, 그 갈등이 절정에 이르게 되고, 이후 해소가 돼 결말에 이르게 돼요. 하지만 페미니즘 문학 비평에서는 이 구조가 ‘남성적’이라고 폭로해요. 남성 작가들은 장대한 이야기, 즉 ‘대서사’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고, 이러한 소설의 구조가 그것의 전형을 보여준다고 주장해요. 마치 인생이 하나의 거대한 스토리가 있는, 장대한 서사를 위한 배경으로 착각한다는 것이죠. 그리고 ‘소설의 구조’가 마치 성행위를 하는 남성의 과정과 흡사하다고 해요. 점점 절정에 치달아 사정을 한 후 마무리하는 것과 닮았다고 비꼬죠. 다소 충격적이지 않나요? 교과서 속 지식이라 절대적으로 받아들였던 내용이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되고 있어요. 그들은 주장하죠. 실제로 삶은 하나의 목적을 향해 달려가는 장대한 서사가 아닌데, 남성 작가들은 원대한 이야기에 집착해 삶을 한 편의 ‘대서사’로 바꾸려는 강박을 보인다고. 이는 ‘여성적 글쓰기’와 대비가 된다고 해요. 즉 실제 삶은 다양한 희로애락이 있는 소소한 일상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대서사’가 아닌 ‘소서사’를 다루는 것이 좀 더 진실된 삶을 구현할 수 있으며, 이렇게 미시적이고 친밀한 것에 더욱 집중하는 여성적 글쓰기가 하나의 대안이라고 말하죠. 하나의 장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일상적인 작은 이야기들의 합창. 일반적으로 남성들이 스포츠 경기 1등과 같이 큰 목표에 가치를 둔다면, 여성들은 친구 혹은 가족과의 대화와 같은 일상 속 친밀감에 더욱 가치를 두는 것처럼, 남성과 여성의 성향이 다르며, 여성적 글쓰기는 여성의 성향이 담겨 기존 소설의 구조와 대치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죠. 한 마디로 우리가 보편적이라고 굳게 믿었던 ‘소설의 구조’ 역시 성 편향적일 수 있으며, 유구한 남성 중심 역사 속 보편적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실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줘요. 우리가 교과서를 통해 배웠던 지식조차 사실은 남성 작가가 지배해 온 문학 세계가 낳은 편향된 지식일 수도 있다니. 분명 페미니즘은 당연한 것을 한 번 더 점검하게 하고, 다양한 시선의 중요성을 알려줬어요.       


출처 - 학습백과zum


결과적으로 이 수업은 샘의 시야를 확장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어요. 비록 초반에는 반발심과 충격이 컸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꾸준히 수업을 따라가다 보니, ‘금성에서 온’ 여자의 희로애락을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고, 남녀 간의 구조적 불평등이 무엇인지 선명하게 인식하게 되었어요. 일상의 당연한 것들이 어떤 이에게는 억압이 될 수 있고, 당연하다고 믿는 당연함이 오히려 현실의 불평등을 은폐하는 기제로 작동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죠. 무엇보다도 자신의 경험 속에서 너무 일상적이라 은폐된 부분까지 치밀하게 해체해 불평등을 폭로하고, 이로써 적극적으로 자신의 권리를 되찾는 노력들이 참 멋있다고 생각했어요. 누구든 자신의 행복을 위해 불합리한 점을 밝히고 좀 더 이롭게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노력은 분명 매력적이잖아요.      


그 후 그동안 관심이 없어 잘 보이지 않았던 여성들의 다양한 노력들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정말 아는 만큼 보이는 것 같아요. 특히 대학교 캠퍼스 안에서 많이 접할 수 있었죠. 우리 학교 중앙도서관 앞은 학생들의 의견을 담은 대자보를 붙이는 공간으로 유명했는데, 그전까지 관심이 없었던 페미니즘 관련 대자보들에 눈길이 가기 시작했고, 공감하는 횟수가 늘어났어요. ‘남학생 단체 카톡방 속 여학생 성희롱 사건 대책 마련해라!’, ‘학내 여성화장실 몰카 문제 해결 촉구’, ‘남교수의 여성 외모비하 발언 규탄’ 등 다양한 페미니즘 이슈가 이미 대학 내에 존재하고 있었죠. 정치외교학과 내에서 일어난 논쟁도 흥미로웠어요. 학과 익명 게시판에 전공 수업들이 남성 중심적으로 편향되어 있고 여성을 위한 정치 수업을 열어달라고 규탄하는 글이 올라와 큰 논쟁이 일어났죠. 성 중립적이라고 믿었던 수업들이 여학우들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나 봐요. 그들의 요구는 받아들여졌고, 이듬해 여성, 노동, 소수자 등을 주제로 하는 정치 수업이 개설되었어요. 예전의 샘이었다면 잘 이해가 되지 않았을 요구들일 텐데, 페미니즘의 관점을 이해한 후 그들의 입장이 어느 정도 공감이 갔고 꽤 설득력 있게 다가왔어요. 졸업 전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수업을 쟁취하는 여학우들이 대단해 보였어요.      


또한 현대 예술 분야에서 페미니즘은 빼놓을 수 없는 주제라는 것을 아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어요. 영문학을 비롯해 현대 문학에서 페미니즘은 중요한 화두가 된 지 오래였고, 다양한 여성의 삶이 예술을 통해 조명되고 있었어요. 영화 역시 페미니즘은 중요한 주제로 다뤄지고 있었죠. 샘이 좋아하는 박찬욱, 홍상수 같은 거장 감독들은 어김없이 페미니즘 주제를 영화 곳곳에 뿌려놓죠. 영화를 비롯한 예술은 현재 우리 사회에게 던지고 싶은 화두를 제시한다고 생각해요. 인간과 세계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탐구가 예술의 목적이라고 할 때, 그들이 꾸준히 페미니즘을 노래한다는 것은, 현재 우리 사회를 이해하는 데 있어 페미니즘이 꼭 다뤄져야 하는 주제라고 강조하는 것이 아닐까요? 훌륭한 예술가들은 세상을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더 나은 삶의 모습을 열어주는 존재니까요. 실제로 영국의 저명한 정치학자인 앤서니 기든스(Anthony Giddens)는 페미니즘은 단순히 여성의 문제를 넘어 현대 민주주의 발전에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고 단언해요. 그의 책 ‘친밀성의 구조변동(Transformation of Intimacy)’에는 민주주의 발달 과정이 등장해요. 먼저 남성들에 의해서 1차적으로 ‘공적’ 영역에서의 민주주의 틀이 잡히게 돼요. 대의 민주주의를 기획하고 선거 제도를 정착시키는 등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국가 차원에서의 민주주의의 기틀을 말하죠. 하지만 이는 ‘형식적인’ 민주주의에 불과하고 ‘실질적인’ 민주주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비단 제도뿐만 아니라 일상생활 속 관계까지 수평적이고 합리적인 민주주의가 뿌리내리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고 해요. 일상 속 개인들이 상하관계가 아닌 자유롭고 수평적인 상태. 이러한 2차적인 ‘사적’ 영역에서의 민주화는 일상생활 속 권력관계를 폭로한 페미니즘의 역할이 컸다고 합니다. 그리고 앞으로의 민주주의 실질화에 여성, 소수자 등이 계속 주도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고 단언하죠. 결국 페미니즘이 앞으로의 민주주의 발전에도 중심적인 역할을 하며, 민주주의 발달을 통해 비단 여성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그 혜택을 누리게 된다고 설명해요.      


이렇듯 대학 시절부터 지금까지 샘의 경험의 결과, 무조건 거부감을 가지고 반발하기 전에 도대체 어떤 주장인지 경청할 필요가 있고,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어요. 샘의 경우 그 과정에서 전부는 아니더라도 대체로 공감이 가는 부분들이 많았어요. 물론 많은 남학생들이 페미니즘에 거부감이 크다는 것 잘 알고 있어요. 사실 학창 시절까지는 남녀 불평등 이야기가 잘 먹히지 않는 게 당연한 것 같아요. 학교에서의 남녀 불평등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죠. 오히려 최상위권을 모두 여학생들이 차지하는 학교도 많고요. 하지만 학창 시절이 지나고 취직 시장에 도달하는 순간 보이지 않는 불평등에 맞닥뜨리게 되죠. 취직 시장에서 여성이 불이익을 받는 현실은 아직 해결해야 할 과제이고, 설령 취직이 된다 해도 유리 천장으로 인해 좀 더 높은 꿈을 꾸는데 한계를 가져요. 물론 많이 변하고 있지만, 결혼 생활에서도 아직도 여성이 희생해야 할 부분이 많은 게 아직까지의 현실이 아닐까 싶어요. 생애 주기를 통틀어 봤을 때, 우리 사회에 더 이상 페미니즘은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은 현실을 그냥 외면하려는 말이 아닐까 해요.      


남학생들이 페미니즘에 거부감을 느끼는 또 다른 이유는 남성을 적으로 규정하고, 결국 남성들에게 피해를 준다는 믿음도 한몫하는 것 같아요. 여성의 요구가 확대됨에 따라 그만큼 남성들이 누렸던 권리가 침해받는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여성의 목소리 확대는 결코 한정된 자원을 두고 다투는 파이 싸움라 할 수 없어요. 장기적으로 봤을 때, 페미니즘의 혜택은 남녀 모두에게 공히 돌아간다고 말하죠. 그리고 그들은 결코 남성을 적으로 규정하진 않죠. 남성이라는 인간이 아니라 남성중심 사회라는 이데올로기를 공격해요. 이 이데올로기 안에서 남성 역시 피해를 보고 있다고 해요. 여성보다 우월한 위치를 유지하기 위해 허황된 남성성을 강요받는다고 하죠. ‘남자는 울면 안 된다. 남자는 감정을 보이면 안 되고 늘 이성적으로 행동해야 한다. 강한 남자가 진정한 남자다.’ 등과 같이 과장된 남성성에 대한 압력으로부터 남자들도 자유롭지 못하다고 해요. 예전에 많이 들었던 저런 말들, 이제는 점점 우스운 말이 되고 있죠? 점점 양성 평등 의식이 커지면서 그만큼 불필요한 남성성도 많이 해체돼 그 신화가 점점 축소되고 있다는 뜻일 거예요. 이렇듯 여성들뿐만 아니라 남성들 역시 좀 더 진솔하고 자유로운 ‘나’로 살아가는데 도움을 주죠. 용어에 비록 ‘여성(femin)’이라는 말이 있지만, 페미니즘이 진정으로 지향하는 것은 남과 여 모두의 해방이 아닐까 해요. 남녀이기 전에 인간 대 인간으로 관계 맺는 세상.      


모든 낯설고 처음 접하는 것은 거부감이 드는 게 당연한 것 같아요. 심지어 자신(남성)을 적으로 두는 것 같은 인상마저 주니 반발심이 생기는 건 자연스러운 것 같아요. 하지만 바로 적대적으로 돌아서기 전에, 먼저 그들이 진정으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무엇인지 파악할 필요는 있다고 봐요. 진정한 논의의 시작은 일단 상대에 대한 무비판적인 이해의 자세라고 생각해요. 충분히 경청한 후 비판해도 늦지 않죠. 샘은 그 이해의 과정에서 색다른 시선을 하나 추가할 수 있었어요. 그들의 논리는 샘이 자유로운 인간관계를 상상할 때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있죠. 여러분도 작은 글 혹은 영상이라도 좋으니 경청의 마음으로 이 새로운 생각의 바다에 발을 담가봤으면 해요.     


그리고 페미니즘에 관심이 많은 여학생들에게는 충분히 탐닉해보라고 응원해주고 싶어요. 가끔 페미니즘이 지나치게 진보적이고 편향된 시각을 강화한다는 어른들의 우려를 듣게 되는데, 샘은 이에 크게 동의하지 않을뿐더러, 어떤 사상이든 간에 깊게 빠져보는 것은 그 자체로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페미니즘은 사실 간단한 학문이 아니에요. 그 안에 다양한 역사와 정치, 그리고 철학이 존재하죠. 그 바다를 헤엄치다 보면 다양한 학문과 접하게 돼 세상에 대한 시야가 크게 확대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라 생각해요. 간혹 페미니즘 하나에만 지나치게 경도돼 모든 것을 남녀 문제로만 바라보려는 학생들을 걱정하기도 하는데, 샘은 이 역시도 언젠가 시선의 균형을 찾을 것이라 생각해 걱정하지 않아요. 사실 페미니즘은 세상을 해석하는 무수한 틀 중 하나이고, 세상을 이해하는 하나의 도구이지 절대적인 도구가 아니에요. 어떤 사상이든 처음 접할 때 그것만을 절대시 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러한 현상 역시 앞으로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균형을 찾아가는 여정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그러므로 페미니즘에 관심이 많고 더 깊게 알고 싶다면 세상의 눈치 보지 말고 적극적으로 탐험하길 바라요. 페미니즘의 프레임으로 바라본 여러분들의 세상, 그 끝은 분명 여러분, 더 나아가 우리 모두의 행복과 맞닿아있으리라 믿어요.            


출처 - <자기만의 방> 책 표지


마지막으로 샘이 좋아하는 에세이의 일부를 인용하면서 마무리하려고 해요. 영국 작가 버지니아 울프의 에세이집인 ‘자기만의 방’ 속 그녀의 호소입니다. ‘자기만의 방’은 셰익스피어와 똑같은 재능을 가진 여동생이 있다고 가정하고, 오빠는 세계적인 문호가 될 때 그녀는 어떻게 좌절해 파멸에 이르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사고 실험으로 유명한데, 페미니즘 문학에 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요. 인용한 부분은 버지니아 울프가 100년 후를 상상하는 내용이에요. 그녀의 상상이 얼마나 실현되었나요? 당시 그녀의 불경스러운 상상이 현재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살펴보세요. 지금 여러분의 상상도 또 다른 미래를 낳을 것입니다.       


“한 세기가 지나면 완전히 변해 있으리라는 것도 가능한 일이지요.

 현관 계단에 다다르며 나는 생각하였지요.

 더욱이 백 년 후에는, 여성은 보호받는 성이기를 그만둘 것이라고 말입니다.

 논리적으로, 그들은 한 때 그들에게 거부되었던 모든 활동과 능력 발휘에 참여할 것입니다.

 아이 보는 여자는 석탄을 들어 올리고, 가게 주인 여자는 기관차를 운전할 것입니다.

 여성들이 보호받는 성이었을 때에 관찰된 사실들 위에 기초한 모든 가정들은 사라지게 되리라는 것이지요. (...)

 그 보호막을 거두고 여성들을 똑같은 능력 발휘와 활동에 접하게 하고 그들은 군인, 선원, 기관사, 부두 하역자로 만들어보십시오.

 여성이라는 것이 보호받는 직업이기를 그만두면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으리라고, 현관문을 열며 나는 생각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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