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 첫 번째 얼룩

by 짱이아빠


다음 날 오전, 서연은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와 씨름하고 있었다. 텍사스의 열기는 컨테이너 사무실의 낡은 에어컨마저 무력하게 만들었지만, 그녀는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모니터의 공정률 데이터에만 집중했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숫자가 증명하는 길 위에서 움직여야만 했다.


그때, 현장 감독 프랭크에게서 무전이 들어왔다.


"김 매니저, 동쪽 구역에 와봐야 할 것 같아. 약간... 이상한 게 발견됐어."


그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섞여 있었다. 일정에 차질이 생기는 것을 병적으로 싫어하는 그였다. 서연은 한숨을 쉬며 안전모를 챙겨 썼다.


현장에 도착했을 때, 인부 몇몇이 갓 파헤쳐진 구덩이 주변에 모여 수군거리고 있었다. 서연이 다가가자 그들 사이로 드러난 광경에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땅의 단면, 그 한가운데에 주변과 확연히 다른, 마치 핏물이 스며든 듯 섬뜩할 정도로 새빨간 흙의 층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게 뭔가요?"

"나도 모르겠어. 이런 흙은 여기서 본 적이 없는데." 프랭크가 흙을 발끝으로 툭 차며 말했다.


그때, 그들 뒤로 조용히 다가온 노인 인부 빌리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의 얼굴은 평소와 달리 굳어 있었다.


"그건 건드리면 안 되오. 우리 조상들이 대대로 '정령의 피가 깃든 땅'이라 부르던 곳이오. 함부로 파헤치면... 재앙이 따를 거요."


빌리의 목소리에는 단순한 미신이라 치부하기 힘든 무게감이 실려 있었다. 인부들의 얼굴에 순간 두려움이 스쳤다. 하지만 프랭크는 코웃음을 쳤다.


"빌리, 농담할 시간 없어. 지금 이것 때문에 벌써 한 시간이나 지체된 거 알아요? 당장 파내서 저쪽 북쪽 흙 더미로 옮겨버려!"


그는 굴착기를 향해 손짓하며 소리쳤다.


"We're behind schedule! Move it!"


서연은 순간 불길한 기분에 휩싸였다. 빌리의 주름진 얼굴에 서린 경고와 핏빛 흙이 뿜어내는 기운이 섬뜩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미신일 뿐이야. 중요한 건 스케줄이야.'


그녀는 프랭크의 결정에 반대하지 않았다. 그것이 합리적인 판단이라 스스로를 설득하며.


빌리의 체념 어린 시선을 뒤로하고, 거대한 굴착기의 강철 삽날이 붉은 흙을 무자비하게 파내기 시작했다.


그날 오후, 가장 나른하고 무더운 시간에 결국 일이 터졌다.


"크아아아악!"


현장 중앙에서 작업 중이던 3번 굴착기가 갑자기 짐승의 울음 같은 굉음을 터뜨렸다. 육중한 차체가 경련을 일으키듯 부르르 떨리는가 싶더니, 곧이어 거대한 강철 팔이 미친 듯이 허공을 휘젓기 시작했다. 조종석에 앉아있던 인부가 비명을 지르며 조종간을 흔들었지만, 마치 다른 영혼에 조종당하는 것처럼 굴착기는 멈추지 않았다.


"피해! 어서!"


프랭크의 다급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인부들이 혼비백산하여 흩어지는 순간, 통제를 벗어난 굴착기의 강철 삽날이 원을 그리며 그대로 옆에서 작업 중이던 인부 두 명을 휩쓸고 지나갔다. 둔탁한 충격음과 함께 두 사람의 몸이 종잇장처럼 허공으로 튕겨 나갔다.


서연은 현장 사무실 창밖으로 펼쳐지는 지옥 같은 광경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아침에 자신이 외면했던 빌리의 경고가 메아리처럼 귓가에 울렸다.


'재앙이 따를 거요.'


아수라장이 된 현장. 고통스럽게 신음하는 부상자들, 겁에 질려 하얗게 질린 동료들. 곧이어 도착한 구급차의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먼지 자욱한 현장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소동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사고를 낸 굴착기의 강철 삽날이 땅에 처박히면서 파헤쳐 놓은 구덩이. 현장을 수습하던 인부 중 하나가 그곳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비명을 질렀다.


흙더미 속에서 삐져나온 것은, 누가 봐도 사람의 것이 분명한 뼈였다. 그리고 사람들이 조심스럽게 흙을 걷어내자, 마침내 온전한 형태가 드러났다.


오래되어 누렇게 변색된 두개골이었다. 그리고 그 두개골의 정수리에는, 손잡이마저 썩어 없어진 낡고 녹슨 도끼날이 섬뜩하게 박혀 있었다.


"......!"


서연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이것은 단순한 공사 현장 사고가 아니었다. 그녀가 평생을 바쳐 쌓아 올린 이성과 합리의 세계에서는 결코 설명될 수 없는, 지독하게 원초적이고 불길한 무언가였다.


인부들은 겁에 질려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빌리의 경고, 붉은 흙, 정령의 저주... 단어 하나하나가 비수가 되어 서연의 이성에 파고들었다.


사이렌 소리가 멀어지고, 현장에는 침묵만이 남았다. 서연은 비틀거리며 자신의 사무실 컨테이너로 돌아왔다. 문을 잠그자마자, 그녀는 등에 기댄 채 그대로 주저앉았다. 눈앞에 도끼가 박힌 두개골의 이미지가 떠나지 않았다.


그녀의 완벽했던 설계도에, 결코 존재해서는 안 될 붉은 잉크가 번져버렸다.


컨테이너 사무실로 돌아와 문을 잠그자마자, 서연은 등에 기댄 채 그대로 주저앉았다. 밖의 소음은 차단되었지만, 머릿속에서는 방금 전의 광경이 생살을 찢는 듯한 비명과 함께 무한으로 재생되었다. 흙먼지와 뒤섞여 풍기던 역한 비린내, 공포에 질려 일그러진 인부들의 얼굴, 그리고… 녹슨 도끼날을 품은 채 침묵하고 있던 끔찍한 두개골.


책과 모니터 속의 데이터만 보고 살아온 인생이었다. '곱게 자랐다'는 말을 싫어했지만, 이런 날것의 사고 현장과 죽음의 흔적 앞에서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온실 속 화초였는지를 통감했다. 영화나 뉴스에서 보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뼈를 울리는 충격음과 코를 찌르는 냄새, 피부에 와닿는 공포의 밀도는 겪어보지 않으면 결코 알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결국 참았던 말이 터져 나왔다. 서울의 그 지긋지긋한 정치 싸움에서 도망치고 싶었을 뿐인데. 정직한 땀과 결과만으로 평가받고 싶었을 뿐인데. 이게 아니었다. 그녀가 원했던 새로운 시작은 이런 지옥도가 아니었다.


"바보같이… 왜 여길 오겠다고 해서…."


자책과 후회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안락한 엘리트 코스를 제 발로 걷어차고 미지의 땅으로 온 오만했던 자신에 대한 혐오감, 그리고 아침에 빌리의 경고를 '미신'이라 치부하며 외면했던 순간의 자신을 향한 죄책감이 뒤섞였다. 이 모든 것은 어쩌면 자신의 오만함이 불러온 재앙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자, 온몸의 피가 차게 식는 듯했다.


통제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통제 불능의 나락. 그것이 서연이 평생을 피해왔던 가장 근원적인 공포였다.

결국 단단하게 닫혀 있던 이성의 둑이 무너져 내렸다. 서연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방울이 터져 나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처음에는 서러운 흐느낌이었지만, 이내 걷잡을 수 없는 통곡으로 변했다. 두려움, 후회, 죄책감, 그리고 이 낯선 땅에 홀로 던져진 외로움이 뒤엉킨 울음이었다.


그때였다. 울음소리에 흐려진 시야 너머로, 컨테이너 창밖을 무언가 길고 하얀 형체가 스르륵, 소리 없이 지나갔다.

서연은 순간 숨을 멈췄다. 울음소리마저 목구멍 뒤로 삼켜졌다. 잘못 본 것이라고 생각하려 했지만, 등골을 타고 오르는 섬뜩한 한기는 분명 현실이었다.


공포는,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