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막 - 텍사스로 향한 이유

by 짱이아빠

김서연의 인생은 언제나 오차 없는 설계도였다.


초등학교 입학 후 단 한 번도 전교 1등을 놓친 적이 없었고, 한국 최고의 상아탑이라 불리는 '대한대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하는 것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녀에게 과정이란 A+라는 결과를 얻기 위한 효율적인 계산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 그녀에게도 설계도에 없던 변수가 있었다. 바로 대학 시절 만났던 첫사랑, 민준 선배였다.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그는 빽빽한 강의 계획표보다 즉흥적인 여행을, 완벽한 리포트보다 밤새 나누는 대화를 더 소중히 여겼다. 그는 서연에게 유일한 쉼터이었고 이해할 수 없는 혼돈이었다.


이별은 도서관 앞에서 찾아왔다. 중간고사를 앞두고 데이트 약속까지 취소하며 책에 코를 박고 있는 서연에게, 민준은 지친 얼굴로 말했다.


"서연아, 우리... 이제 그만해야 할 것 같아."

"...갑자기 무슨 소리야?"

"너랑 같이 있어도... 난 항상 혼자인 기분이야. 네 옆자리는 늘 책이랑 성적이 차지하고 있잖아. 나는 그냥 네 완벽한 인생 계획에 필요한 구성품 중 하나인 것 같아."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서연이 이토록 치열하게 사는 이유는 더 나은 미래, 즉 두 사람의 안정적인 미래를 위한 것이 아니었던가? 그의 이별 통보는 서연의 머릿속에서 '노력 부족'이라는 네 글자로 변환되었다. 내가 더 완벽했다면, 그가 흔들리지 않았을 텐데.


그 이별은 서연을 더 단단하게, 그리고 더 차갑게 만들었다. 예측 불가능한 감정은 결국 상처만 남기지만, 숫자로 증명되는 결과는 결코 자신을 배신하지 않는다고 믿게 되었다.


그런 믿음으로 입사한 '투성(Toosung)'은, 졸업과 동시에 그녀를 모셔가다시피 스카우트한 국내 최대 반체 기업이었다. 서연은 자신의 신념을 증명할 최고의 무대라 생각했다.


하지만 유리궁전처럼 빛나던 서울 중심가의 '투성' 본사 건물은, 그 속살은 또 다른 종류의 감정이 지배하는 곳이었다. 실력이나 열정이 아닌, '어느 라인을 탔는가'가 더 중요한 정글이었다. 밤샘과 주말 반납을 불사하며 매달렸던 '차세대 메모리 동기화 기술' 프로젝트의 공은, 회식 자리에서 상무에게 술을 잘 따른 최 부장의 것이 되었다.


첫사랑에게는 감정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버림받았고, 회사에서는 감정이 없다는 이유로 이용당했다. 차가운 배신감과 투명인간이 된 듯한 무력감. 서연은 깨달았다. 이곳 역시 결과가 아닌, 비열한 감정의 정치판일 뿐이라는 것을.


도망쳐야만 했다. 이 숨 막히는 빌딩, 역겨운 술자리, 공허한 칭찬이 없는 곳으로.

그때, 운명처럼 메일 한 통이 도착했다.


[인력 파견 공고: 미국 텍사스 신규 공장 건설 프로젝트]


사내에서는 '임원들의 무덤'이라 불리는 프로젝트였다.


그 별칭이 붙은 이유는 명확했다. 최근 강화된 미국의 반도체 공급망 재편 압박에 의해 '투성'이 울며 겨자 먹기로 떠안은 프로젝트였기 때문이다. 실리콘밸리보다 저렴하다는 명목이었지만, 그럼에도 천정부지로 솟는 텍사스의 인건비를 감당하며 만든 반도체는 가격 경쟁력에서 중국이나 대만 제품에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즉, 텍사스 공장은 시작부터 '수익 창출'이 불가능한, 정치적인 쇼에 가까운 프로젝트였다. 때문에 그룹 회장 눈 밖에 난 임원들을 조용히 정리하는 유배지로 활용되고 있었다. '한 번 텍사스로 발령 나면, 다시는 서울 본사로 돌아오지 못한다.' 이는 '투성' 내부의 불문율이었다.


모두가 삭제 버튼을 누를 그 메일에서, 서연은 오히려 한 줄기 빛을 보았다.


'텍사스…'


끝없이 펼쳐진 황무지, 작열하는 태양. 실패가 예정된 곳이라면, 오히려 비열한 정치 싸움은 없지 않을까. 그곳이야말로 오직 '결과'만으로 평가받는 정직한 땅일 거라는 모순된 환상이 피어올랐다.


서연은 망설임 없이 '지원' 버튼을 클릭했다.




인천공항을 떠나 14시간의 비행 끝에 도착한 텍사스 오스틴의 공기는, 숨이 턱 막히는 열기와 끝없는 지평선으로 그녀를 맞았다.


"Welcome to Texas, Ms. Kim."


퉁명스러운 현장 감독의 인사를 받으며 공사 현장에 첫발을 내디딘 서연은 결심을 다졌다.


'그래, 여기서 다시 시작하는 거야. 감정 따윈 필요 없어. 오직 완벽한 결과만으로 증명해 보이겠어.'


하지만 그녀는 아직 알지 못했다. 자신이 도망쳐 온 서울의 정글보다 더 위험하고 근원적인 공포가, 바로 이 땅 아래에서 수백 년간 잠들어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 공포가 깨어날 날이 머지않았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