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부: 케일럽

by 짱이아빠


"......!"


서연은 순간 숨을 멈췄다. 울음소리마저 목구멍 뒤로 삼켜졌다. 컨테이너 창밖을 스쳐 지나간 길고 하얀 형체. 잘못 본 것이라고 필사적으로 되뇌었지만, 등골을 타고 오르는 섬뜩한 한기는 분명 현실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낡은 창문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온 바람이 귓가를 스쳤다. 그리고 그 바람결을 타고, 마치 수백 년 묵은 먼지 쌓인 목소리 같은 음성이 들려왔다.


"동쪽에서 온 자… 하늘에 닿으라…."


서연은 귀를 막으며 비명을 질렀다. 환청이었다.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한 환각과 환청일 뿐이라고, 그녀의 이성이 필사적으로 외쳤다. 하지만 심장은 얼음장처럼 차게 식어버린 뒤였다.


그날 이후, 공사 현장은 지옥으로 변했다.


굴착기 사고와 두개골 발견으로 인부들은 극도의 공포에 휩싸였다. 아무도 동쪽 구역으로는 가려하지 않았고, 해가 떨어지기 무섭게 현장을 빠져나갔다. 야간 작업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이한 일들은 멈추지 않았다. 견고하게 쌓아 올린 철골 구조물이 다음 날 아침이면 이유 없이 휘어져 있거나, 누군가 밤새도록 현장을 돌아다닌 듯 진흙 발자국이 찍혀 있었지만 CCTV에는 아무것도 녹화되지 않았다.


서연은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기 일쑤였다. '동쪽에서 온 자, 하늘에 닿으라'는 불길한 속삭임이 귓가를 맴돌았다. 본사에 뭐라고 보고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인한 공정 지연' 따위의 보고서를 올렸다간 당장 미치광이 취급을 받을 것이 뻔했다. 그녀는 이 모든 현상을 '원인 불명의 기계 결함'과 '현지 인부들의 태업'으로 포장하며 위태로운 하루하루를 버텨냈다.


그러던 중, 결정적인 사건이 터졌다. 유일하게 붉은 흙의 정체를 경고했던 노인 인부, 빌리가 실종됐다.


그는 며칠 전부터 "그분이 깨어나셨어. 내가 막아야 해..."라는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현장 주변을 맴돌았다고 했다. 그리고 사흘 전 아침, 그의 낡은 픽업트럭만 현장 입구에 남겨진 채 연기처럼 사라졌다.


현지 경찰은 신고를 받고 출동했지만,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성인의 가출, 특히 이 광활한 텍사스에서는 흔한 일이라는 것이었다. 며칠 방황하다 돌아오거나, 아니면 영영 돌아오지 않거나. 그들은 단순 가출로 잠정 결론 내리고 수사를 종결하려 했다. 프랭크는 보험 처리가 골치 아프다는 듯 인상만 썼고, 인부들은 이제 저주가 사람까지 잡아간다며 더욱 두려움에 떨었다.


서연은 혼란스러웠다. 빌리의 실종이 붉은 흙과 관련 있다는 불길한 직감이 들었지만, 경찰도 손을 놓은 마당에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날 저녁, 퇴근 준비를 하던 서연의 컨테이너 사무실 문을 누군가 거칠게 두드렸다.


"김서연 매니저님, 계십니까?"


문을 열자, 해 질 녘의 붉은 노을을 등지고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땀과 먼지에 절어 헝클어진 머리, 며칠 밤이라도 새운 듯 충혈된 눈.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압도하는 것은, 절망과 분노, 그리고 깊은 슬픔이 뒤엉킨 그의 검은 눈동자였다.


"누구시죠?"


"케일럽입니다. 빌리 할아버지 손자예요."


케일럽. 그의 목소리는 거칠었지만, 할아버지를 찾는 절박함이 묻어났다. 그는 경찰이 수사를 제대로 하지 않는다며 울분을 토했다.


"할아버지는 절대 말없이 떠나실 분이 아니에요! 분명... 이 공사장에서 무슨 일이 생긴 겁니다. 제발, 할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목격된 곳을 보게 해주세요."


그의 눈을 보는 순간, 서연은 거부할 수 없는 이끌림을 느꼈다. 그 슬픔에 찬 눈빛은 마치 과거의 상처를 떠올리게 했고, 동시에 그녀가 잊고 살았던 '결과' 이면의 '감정'을 건드렸다.


그녀의 이성은 경고했다. '쓸데없는 일에 휘말리지 마. 네가 책임질 영역이 아니야.'


하지만 그녀의 입은 이미 대답하고 있었다.


"...따라와요. 야간 출입은 금지지만, 지금은 경비가 없을 거예요."




서연은 케일럽을 데리고 해가 완전히 저문 공사 현장으로 향했다. 두 사람의 손에는 손전등 하나씩만 들려 있었다. 낮의 굉음은 사라지고, 오직 귀뚜라미 소리와 스산한 바람 소리만이 어둠을 채웠다.


빌리의 트럭이 발견된 현장 입구 근처를 수색하던 중이었다. 케일럽이 무언가를 발견하고 멈춰 섰다. 빌리가 늘 지니고 다니던 작은 가죽 부적이었다. 그가 부적을 집어 드는 순간, 어디선가 불어온 돌풍이 두 사람의 손전등을 동시에 꺼뜨렸다.


"젠장!"


완벽한 암흑.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공포가 순식간에 서연의 목을 졸랐다. 굴착기의 굉음, 도끼 박힌 두개골, 하얀 형체가 한꺼번에 떠올랐다.


"흐읍...!"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삼키며 주저앉았다. 떨리는 손으로 손전등 스위치를 아무리 눌러도 불은 켜지지 않았다.


"괜찮아요?"


그때, 어둠 속에서 케일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곧, 따뜻하고 커다란 손이 떨고 있는 그녀의 손을 찾아 감쌌다. 그의 손은 투박했지만, 그 어떤 위로보다도 든든했다.


"진정해요. 그냥 바람이에요."


케일럽은 서연의 손을 잡은 채, 다른 손으로 자신의 손전등을 몇 번 내리쳤다. 희미한 불빛이 깜빡이다가 이내 다시 어둠을 밝혔다.


"이쪽이에요."


그는 서연의 손을 놓지 않고, 그녀가 일어설 수 있도록 부축했다. 서연은 그의 손바닥에서 전해져 오는 강한 체온과 심장 박동을 느끼며, 겨우 숨을 고를 수 있었다.


다시 켜진 손전등 불빛 아래,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공포에 질린 서연의 눈동자와, 그녀를 안심시키려는 케일럽의 깊은 눈동자.


서연은 깨달았다. 자신의 이성적인 판단과 계획이, 이 예측 불가능한 텍사스의 어둠 속에서는 아무런 힘이 없다는 것을. 그리고 지금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완벽한 보고서가 아니라, 이렇게 맞잡은 따뜻한 손이라는 것을.


그녀는 케일럽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그것은 그녀의 이성적인 판단을 넘어선, 명백한 '변수'의 시작이었다.


"할아버지를... 꼭 찾아야겠어요."


케일럽이 어둠 속 어딘가를 응시하며 말했다.


"그러기 위해선, 이 땅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 해요."


서연은 잡힌 손에 힘을 주며 대답했다.


"최대한...도울게요."


그날 밤, 두 사람은 단순한 공장 관리자와 실종자의 가족이 아닌, 거대한 미스터리를 함께 파헤칠 운명 공동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