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서연은 '현장 안전 점검'이라는 공식적인 명목을 내세워 공사 현장 입구에 방치된 빌리의 낡은 픽업트럭으로 케일럽을 이끌었다. 어젯밤, 어둠 속에서 맞잡았던 손의 온기가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하면서도 묘한 기류를 만들고 있었다.
트럭 내부는 빌리의 손길이 닿은 듯 정돈되어 있었지만, 조수석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져진 공구 가방 하나가 유독 눈에 띄었다. 케일럽이 가방을 열자, 공구가 아닌 낡은 가죽끈으로 묶인 지도와 서류 뭉치들이 쏟아져 나왔다.
두 사람은 근처의 인적이 드문 창고로 몸을 숨겼다. 먼지 쌓인 창고 바닥에 낡은 자료들을 펼쳐놓자, 텍사스의 잊혀진 역사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1870년대로 표기된 낡은 지도였다. 현재 '투성'의 공장 부지, 그중에서도 정확히 '동쪽 구역'이라 불리는 곳이 붉은색 잉크로 둥글게 표시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붉은 매의 안식처'라고 희미하게 적혀 있었다.
"붉은 매(Red Hawk)..." 케일럽이 이름을 나지막이 읊조렸다.
"할아버지에게 전설처럼 들었던 이름이에요. 이 땅의 마지막 원주민 부족, 아파치 콤(Apache-Kom) 족의 마지막 추장이었다고."
서연은 함께 발견된 낡은 신문 스크랩과 지역 역사 자료집의 복사본들을 급하게 훑어 내려갔다. 그녀의 이성적인 두뇌가 퍼즐 조각을 맞추기 시작했다.
그들의 역사는 잔혹했다. 1870년대, 텍사스 서부 개척이 한창이던 시절, 개척자 군대는 이 비옥한 땅의 마지막 주인이었던 아파치-콤 족을 눈엣가시로 여겼다. 그들은 최후의 결전을 앞두고, 승리를 위해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비열한 만행을 저질렀다.
그것은 '전투'가 아닌 '사냥'이었다.
개척자들은 정면 승부 대신, 추장 '붉은 매'를 비롯한 전사들이 식량을 구하러 나간 틈을 타 그들의 마을을 급습했다. 그리고 그곳에 남아있던 부족의 여자들과 아이들만을 골라 납치하고 잔인하게 학살했다. 전사들의 전투 사기를 꺾고, 그들의 영혼을 송두리째 무너뜨리기 위한 치밀하고도 잔혹한 심리전이었다.
서연은 자료를 읽어 내려가다 자신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글자 하나하나에서 피비린내가 풍기는 듯했다.
전사들이 돌아왔을 때, 마을에는 피에 젖은 아이들의 장난감과 여자들의 장신구만이 흩어져 있었다. 가족을 잃은 전사들의 절규는 텍사스의 하늘을 찢었지만, 그들의 분노는 이미 계획된 함정 속에서 무기력하게 부서졌다. 사기가 꺾인 그들은 이성을 잃고 덤벼들었고, 개척자들의 총구 앞에서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추장 '붉은 매'는 마지막까지 싸웠다. 그는 아내와 어린 딸이 학살당한 바로 그 자리, 지금의 '동쪽 구역'에서 수십 발의 총알을 맞고서야 쓰러졌다. 전설에 따르면, 그가 흘린 피가 너무도 많아 그 일대의 흙이 영원히 붉게 물들었다고 했다.
'붉은 흙(Red Earth)'.
그것은 단순한 흙이 아니었다. 한 부족의 원한과, 마지막 추장의 피눈물이 깃든 신성한 무덤이었던 것이다.
서연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한국 회사 '투성'이, 그리고 프랭크가 파헤쳐 버린 것은, 바로 '붉은 매'의 원혼 그 자체였다.
"이럴 수가..."
케일럽이 다른 서류를 쥔 손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것은 수십 년 전, 개척자들이 그들의 '승리'를 기념하며 바로 그 학살의 땅 위에 세운 기념물에 대한 기사였다.
"그들은... 그 자리에다 초대 미국 대통령의 얼굴 석상을 세웠어. 우리의 역사를 지워버리고, 그들의 승리를 조각해 놓은 거야."
서연은 할 말을 잃었다. 거대한 아이러니, 혹은 의도된 모욕이었다.
빌리의 자료 뭉치 맨 아래에는 최근 날짜의 서류들이 있었다. '붉은 매' 추장의 기념비를 세우기 위해, 원주민 후손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으고 있다는 모금 활동 전단지였다. 빌리는 그들을 돕고 있었다. 이 땅의 역사를 바로잡고, 원혼을 달래기 위해 평생을 바쳐 노력해왔던 것이다.
"할아버지는... 이걸 막으려 하셨던 거야." 케일럽의 눈에 슬픔과 분노가 이글거렸다. "공사가 시작되고, 붉은 흙이 파헤쳐지자... 할아버지는 혼자서라도 그분을 막으려 하셨던 거야."
서연은 비로소 모든 조각이 맞춰지는 것을 느꼈다. 굴착기의 비명, 도끼 박힌 두개골(아마도 그 시절의 유물이었으리라), 그리고 자신에게 들렸던 그 목소리.
'동쪽에서 온 자, 하늘에 닿으라.'
"케일럽," 서연이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우리가...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드렸어."
두 사람은 끔찍한 진실 앞에서, 자신들이 상대해야 할 존재가 단순한 유령이 아닌, 수백 년 묵은 분노와 슬픔으로 가득 찬 거대한 원혼임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