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박근형님이 최근 영화 홍보 자리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후배들을 돕고 싶고, 해주고 싶은 일이 많은데 시간이 없어.”
누군가 옆에서 “많이 바쁘셔서 그러시겠죠”라고 하자, 박근형님은 이렇게 덧붙였다.
“살 날이 얼마 안 남았는데, 할 일은 많고… 그래서 마음이 좀 쫓겨.”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스스로 느끼는 마음은 어떨까. 간혹 궁금해지곤 하던 그 질문이 다시 떠올랐다. 그 마음은 어떤 표정으로 세상을 바라볼까.
“갈 때가 다 돼서 그런가, 왜 이리 주책인지 몰라.”
엄마가 가끔 아빠한테 농담으로 던지는 이 말이 요즘은 농담처럼 들리지않아 가슴이 덜컹한다. 그리고 나는 아빠의 표정을 살피게 된다.
우리 중 누구도 자신의 삶이 언제 꺾일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런 말들은 묻어두고, 터부시하던 죽음에 대한 생각을 소환한다. 갑자기 멀리 있던 단어가 바로 눈앞으로 다가오는 느낌. 누구도 언제 꺽일지 모르지만, 반드시 한번은 꺽이는 생에 대한 진지한 생각을 하게 한다.
‘아빠스테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정작 아빠 이야기는 별로 나오지 않는다는 걸 눈치챘을지 모르겠다. 그게 아빠를 묘사하는 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늘 그 자리에 계셨지만, 때로는 없는 듯 조용한 사람. 그런데 돌아보면 어떤 순간에도 아빠가 없었다면 이어지지 못했을 것 같은 시간들이 있다.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지만 몫을 묵묵히 해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알게 된 건 얼마되지 않았고, 다행인 건, 그걸 아빠에게 알려드릴 수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십 년 넘게 혹서에도 혹한에도 하루 종일 걸어다니는 일을 하셨던 아빠는 환갑 즈음 무릎에 무리가 왔다. 그즈음 나도 개인사의 폭풍을 조금 정리하고 주변을 동시에 볼 수 있기 시작한 때였다. 마음의 여유가 생기자 처음으로 부모님을 모시고 여행을 갈 수 있게 되었다.
그 여행에서 찍은 사진 한 장이 있다. 매번 볼 때마다 마음이 저릿해지는 사진이다.
사진 속 아빠는 한 손에 지팡이를 짚고 있다. 앞에 세워둔 카메라에 타이머를 걸고 동생이 “모두 하늘로 점프!”라고 외치자 아빠도 함께 뛰어오르신다. 무릎이 아픈 다리는 땅에 붙은 채로 남아 있고, 다른 한쪽 다리만 번쩍 들려 있다. 아빠의 표정은 아이처럼 해맑다. 하늘 가까이 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사진을 보고서야 비로소 그 자리의 아빠를 또렷하게 바라보게 된다.
아빠는 어떤 상황에서도 시간을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으려는 사람이다. 그리고 나도 그런 아빠를 많이 닮았다. 어제는 엄마에게 톡이 왔다.
“아빠가 새벽부터 공주에 밤줍기 일일여행 가셨어.”
그 문장을 읽는데 올해 한국방문에서 돌아오기 전에 아빠가 하신 말씀이 생각났다.
“언제 갈지 모르는데, 세상에 있는 거 보고, 하고, 맛보고...할 수 있는건 다 해보고 싶다.”
가끔 생각한다. 일하시느라 무릎 연골이 닳도록 걸어 다녔던 그 시간들이 아빠가 가보고 싶었던 곳들을 가는 노력이자 시간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시간이 없어.
배우 박근형님의 말씀이 유난히 마음에 맴도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