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다운타운 포틀랜드에서 일정을 시작한다.
내 다리 길이에 안성맞춤인 리클라이너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어내기 힘들었던 내가 움직여보기로 마음먹은 몇 가지 동기들 중에 단연코 1등이었던 곳이 바로 다운타운 포틀랜드이다. 2009년, 첫 미국여행의 설레는 마음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는 곳.
지구인들에게 험난했던 시간, 코로나 팬데믹을 지나가는 동안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노숙자들과 다운타운 포틀랜드의 상징인 붉은 벽돌색의 오랜 건물들 벽에 새겨진 험한 낙서들, 도둑들로부터 매장을 지키기 위해 무시무시하게 올려쳐진 철창들로 인해 이후 우울해졌던 곳이었다. 하지만 못 본 몇 해 사이, 주정부와 시민들의 노력으로 거리는 다시 전처럼 깨끗해졌고, 건물들과 오래된 커피숍들, 오래된 수제 맥주집들이 다시 활기를 찾았다.
낡은 벽돌 건물들이 늘어선 거리 한복판에는 독립서점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로 알려져 있는 'Powell’s City of Books'가 있다. 나는 다운타운 포틀랜드에서 이곳을 제일 사랑한다. 지난 몇 회의 내 글들을 본 사람이라면 놀라운 일은 아닐 것이다.
다운타운 포틀랜드의 한 블록 전체를 통째로 삼킨 이 책의 제국은 아홉 가지 색깔의 방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서점의 가장 큰 매력은 새 책과 중고 책이 한 선반 위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는 것이다. 누군가가 친 밑줄이 듬성듬성 보이는 중고 책과 빳빳한 신간 사이에서 고민하는 과정은, 영화 '시월애'에서 느껴지던 앞서간 이의 사유와 조우하는 즐거움을 준다. 꼭대기 층 'Rare Book Room'에서 고서의 향취에 취하다가도, 1층 카페에 앉아 책의 향기와 책표지의 개성과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과 책장을 넘기는 소리와, 책을 가운데 두고 토론하는 이들의 두런두런하는 소리와, 입구의 문이 열리고 닫히며 안과 밖의 공기가 섞이는 그 모든 분위기에 두어 시간 취할 시간을 확보했다.
이후 향한 곳은 'Pietro's Pizza'이다.
이곳은 2009년에도, 2011년에도, 2016년에도, 2020년에도, 그리고 2025년에도, 포틀랜드에 오면 어김없이 찾아가는 곳이다. 왜냐하면, 이곳은 남편 배꼽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1950년대부터 이 지역의 자리를 지켜온 이곳은 세련된 요즘 맛집과는 다른, 투박하지만 정겨운 포틀랜드의 옛 얼굴을 하고 있다. 나에겐 오랜 시장 순대맛이 있다면, 남편에겐 이곳의 피자가 그런 것이다.
도우와 페퍼로니만 있는 비주얼, 단조롭고 심심한 피자에 적잖이 놀라고 실망했던 내가 생각난다. 지금은? 다양한 종류의 피자가 있는 한국에 가서도 페퍼로니 피자를 찾는다. 기름지고, 뻘건 페퍼로니가 잔뜩 얹어진 얇은 도우의 페퍼로니 피자가 최고라고 외치고 다닌다. 때론 사람도 바뀔 수 있다.
뒤이어 잠시 들러본 'WalMart'에서 전에 본 적 없는 진열을 보았다. 속옷과 양말들이 모두, 보석처럼 자물쇠가 채워진 진열장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심히 짐작이 된다. 나 같은 고객은 속옷을 사려면 점원을 불러야 한다는 번거로움이 싫어 오지 않을 텐데, 매출이 줄더라도 좀도둑을 예방하는 게 더 낫다고 결정할 만큼 고심한 흔적이 느껴진다.
어제 본 한 스웨덴 출신 유튜버의 말이 떠올랐다. 해만 지면 집에 있어야 하는 나라들에 비하면 한국은 얼마나 안전한 나라냐고. 여기 이 진열장이 그 말에 대한 예시 하나를 보태는 셈이다.
처음 시어머니가 계시는 동네에 왔을 때, 다시 또 올 수 있을까 싶어 얼마나 열심히 눈과 마음에 쟁여 담아두었던지, 올 때마다 마치 수십 년 살았던 동네를 찾아오는 느낌이다. 함께 사는 사람의 마음과 정서와 내가 동화되는 경험일까.
작고 낡은 집이지만, 다락방에서 우리 식구 오밀조밀 잠이 들고, 삐그덕거리는 계단소리에 잠자는 사람이 깰까 싶어 살살 내려가던 날들, 뒷마당에서 한여름의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던 날(여름에 방문했던 우리를 위해 크리스마스에 사두었던 선물을 풀어보던 날) 등등.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넉넉하진 않아도, 작은 것들을 나누고 베풀면서 마음만은 풍요롭고 넉넉했던 날들.
시어머니는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 남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혼자서 애 키우기 힘들었을 텐데 네가 이제부턴 잘해야 돼.
왈칵 눈물이 나는 것을 꾹 참았다.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기로 매일 다짐하던 때였기 때문이다.
시어머니와 남편, 그러니까 이 모자의 관계는 내가 살면서 본 중에 가장 쿨하고, 가장 가볍고, 또 가장 정겨운을 모두 담은 관계이다. 함께 있은 시간이 반나절도 채 되지 않았지만, 내일 다시 들르겠다고 약속을 하고 오늘 밤 묵어갈 숙소가 있는 다운타운 포틀랜드로 돌아와 10여 년 전, 일주일 정도 묵어갔던 'King's Tower'에서의 추억을 살려보기로 한다.
오전에 들려간 'Powell's Books'가 한 블록 아래에 있는 환상적인 위치의 호텔은 나의 추천이다. 물론 남편은 나의 꿍꿍이를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을 테다.
상점엔 살 것이 있을 때만 가는 곳이고,
전화는 용건만 간단히 하는 것이고,
책은 알고 싶은 것이 있을 때만 읽는 것이라는 신조를 매우 투철하고, 일관성 있게 지키고 사는 남편에겐 하릴없어도, 문만 열어도 행복해지는 곳이 있다는 게 여전히 낯설겠지만, 내 개인 취향은 존중해주는 편이다. 필요한 곳에 데려다주고, 가까운 곳에 숙소를 정해준다.
호텔문을 열고 왼쪽으로 나와 횡단보도를 딱 두 번 건너면, 심장이 쿵쿵 뛰는 서점의 자태가 보인다.
'Powell's Books'의 구석구석을 꼼꼼히 샅샅이 살핀 후, 'Pearl District'로 향한다. 호텔방에서 쉬고 있던 남편이 합류한다. 낡은 창고 지구를 개조해 만든 이 동네는 뉴욕의 소호를 닮은 듯하면서도, 포틀랜드 특유의 여유롭고 소박한 감성이 느껴진다.
거리를 따라 걷다 보면 세련된 갤러리와 로컬 디자이너들의 부티크, 그리고 감각적인 소품샵들이 끝없이 이어진다. 특히 'NW 23rd Avenue'를 따라 늘어선 샵들은 구경거리로 가득하다. 화려한 간판 대신 정갈한 쇼윈도가 시선을 붙잡고, 'Made in Portland'의 느낌이 묻어나는 물건들이 가득하다. 잘 큐레이션 된 잡지를 넘기는 기분도 든다.
그렇게 붉은 벽돌 담벼락을 따라 걷다 '이병헌'을 만났다. 'No other Choice, 어쩔수가없다'라는 영화 포스터다. 모국 밖에서 모국에서 들려오는 소식들이, 비극보다 희극이 더 많아진지가 제법 되었음에도 길을 걷다가 발에 채이는 돌멩이처럼 한국의 노래와 영화들이 수시로 들리고 보이는 세상을 살고 있음이 새삼스럽게 또 감사하다.
'Keep Portland Weird'
라는 슬로건을 가진 이 곳과 고추화분을 든 이병헌이 묘하게 어울린다.
'Salt & Straw'라는 이름의 아이스크림가게에 들어가서 아이스크림 한 스쿱을 주문했다. 포틀랜드 출신의 아이스크림 브랜드 'Salt & Straw'는 '바닷소금과 초콜릿'처럼 검증된 조합은 물론이고, '블루치즈와 배', '올리브 오일' 등 상상치 못한 재료들을 사용한다. 내가 정말 못하는 일이 있다면 '선택'인데, 많고 많은 종류의 아이스크림 중에서 단 하나를 골라야 한다는 압박을 이겨내고 고른 것은 'Honey Lavender'이다.
'Fred Meyer' 에서 사과와 바나나를 몇 개 사가기로 했다.
각 주마다 마트 브랜드들이 다른데, 'Fred Meyer'는 미국 전 지역을 아우르는 대형 유통회사 'Kroger' 계열의 대형 마트로 Washington, Oregon, Idaho 그리고 Alaska 주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힙한 이름을 듣고 홈플러스나 이마트처럼 이름만 들어도 마트일 것임을 짐작 가능한 이름이 아니어서 낯설고 신박해했던 기억이 있다.
우리나라 마트들도 경영주나 창업자 이름을 따서 지으면 어떨까했던 생각을 해봤던 기억도 난다.
다운타운 포틀랜드를 한 바퀴 휙 돌아, 남편이 대학시절 지냈던 아파트를 지나, 그 아래 축구 경기장을 지나, 도심을 통과하는 전철길을 따라 호텔로 돌아왔다.
고향은 아니지만, 얼마 전까지 마음속에서 들썩거리던 향수가 살짝 가라앉는 느낌이다. 지금보다 더 젊었을 때,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생기는지 모르겠던 시간을 지나, 나에게도 이런 일이 생기는 때도 있구나 싶던 시간들이 떠오른다. 다만 너무 선명하지 않아서 아프지 않고, 대충 실루엣정도만 떠올라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하게 할 만큼.
그때처럼 탱탱한 피부도,
그때만큼 잘 보이는 눈도,
그때만큼의 무모함도,
그때만큼의 불안도,
그때만큼의 열정도,
그때만큼의 꿈도,
그때만큼의 어리석음도,
그때만큼의 머리숱도 없기에,
좋은거 더하고
나쁜거 빼기하고
그러고 나면...
흠...
그때만큼이나 나쁘지 않은 지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