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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은경 Nov 02. 2020

E15. 우리의 대화는 이게 전부였어


운동할 때면 보통 단절을 원한다.

소음과의 단절, 수다와의 단절, 세상과의 단절.

고로 듣지 않고 말하지 않는 게 운동하는 내 모습인데, 이는 운동에도 “정신일도하사불성”의 애티튜드가 필요함을 알아서다. 운동에 집중 깨는 건, 나에게도 서로에게도 실례다.


단절을 위해 내가 찾은 방법은 “음악을 크게, 아주 크게, 아무 소리도 스며들지 않아, 어떤 소리도 들을 수 없는 나를, 상대가 알아챌 만큼 아주 크게”듣는 것이다. 고막 나갈지 모른다는 우기 걱정은 달리 나온 게 아니다. 나의 이런 행동은 일종의 방어와 같아 “운동 중이니 말 걸지 마세요.”를 알리는 신호인데, 제법 효과적이라 입 한 번 벌리지 않고 올 때가 입 벌리고 올 때보다 더 많다.




이어폰 두개에 고립을 만들어 무게를 든다.


“헤이 나나나- 미치지 않으려면 미쳐야해.”


BTS의 ON 들으며 반은 미쳐 운동 중이었다. 사내 하나가 시야에 찬다. 내 주위를 쭈뼛거리는 게 거울에 비친다. 이쯤 되면 기운으로도 알 수 있는데, 덕분에 집중이 깨졌다. 귀는 막았지만 시선까진 막을 수 없어 주변을 서성이는 남자가 거슬린다.


이런 일은 아주 한 번만 있는 건 아니다.

비슷하지만 다양한 형태로 주위를 맴도는 남자가 있다. 맴맴 거리는 남자는 어쩐지 내 눈치를 보고 있고, 나로부터 무언가를 바라고 있는 낌새다. 어떤 때는 내 뒤를 졸졸 쫓아오기도 하는데, 돌아서면 남자가 있고, 옮겨와 옆을 보면 또 남자가 있다. 그런 남자를 빤-히 바라보기라도 하면, 남자는 내게서 시선을 훔쳐 달아난다.


이럴 때면 이어폰을 벗어 둘까, 싶기도 하다.

하고 싶은 말과 참고 있는 말이 있어 보이는 당신에게, 차단을 거두어야 하는 것 아닐까, 생각 들기 때문이다. 물음을 기다리는 것도 아닌, 대꾸를 해줘야 하는 것도 아닌, 우리의 공기가 상당히 불편하다. 아아. 집중을 잃었다. 나는 근육의 움직임 느끼는 대신 팔을 펴고 팔을 구부리는 동작의 반복만 가져간다. 이쯤 되면 운동이 아니라 행위에 가깝다. 속사정은 알 길 없이 나만 징- 하게 쳐다보는 남자를 보면, 생각은 여기까지 도달한다.


‘전화번호 물어보면 줘야 돼, 말아야 돼. 거참.’


도끼스러운 병이 내게 있어 그렇다. 이것도 병이라면 병인데, 쉽게 낫는 병은 아닌 거 같다. 병세가 지속된 기간은 제법 되었고, 특효약은 아직 개발 되지 않은 걸로 안다. 그런 도끼(병)녀에게 보인 남자 모습에 이내 병세가 악화된다. ‘주고 싶진 않은데, 안 주면 다음 날 헬스장에서 보기 껄끄러우려나. 주는 게 더 이상한가. 좌우당간 오해를 사고 싶진 않는데. 안 보면 그만도 아닌 매일 만나는 사이의 부담이란.’ 그 사이 20번의 깔짝깔짝을 했다. 운동 아닌 율동을 했다.


잃어버린 집중을 되찾기 위해 한 템포 쉬어가기로 했다.

벤치에 일어나 가볍게 스트레칭을 한다. 읏쨔. 목도 한 모금 축이고, 숨도 고른다. 그런 나는 틈을 보였나 보다. 틈을 타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이번엔 진짜다. 허나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다. 벙긋거리는 입 모양만 보일 뿐인데, 급히 이어폰 한 쪽을 내려 남자의 말을 듣는다. 그래서 무슨 말이 내게 하고 싶은 게요?


“네?”

“이거 쓰시는 거 에요?”

“아 아니요. 쓰세요!”


공용에 해당하는 헬스장 비품을 그도 쓰고 싶었던 거다. 때문에 주변을 서성인 거 였고, 내가 사용을 멈춘 사이 예의바른 인터셉트를 위해 나에게 말을 건 거다. 안 쓰시면 써도 되겠느냐고. 나는 “쓰시라”는 말과 함께 이까짓 것쯤 양보 하고, 다시 뚫렸던 귀를 막아 고립을 만든다. 민망은 내 몫이라 엄한 볼륨만 높이고 있다. 헬스장 조명이 오렌지색이라 다행이다. 붉어진 얼굴을 들킬 뻔 했다.


이거였어. 나한테 하고 싶던 말이. 내 주위를 맴맴 거리던 이유가.

우리의 대화는 이게 전부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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