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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은경 Jan 18. 2021

그럼에도 나와야 하여

지난 주말을 언짢은 마음으로 보냈다.

소고기에 일시적으로 눌“렸던” 감정이 토요일 되자 불쑥, 하고 다시 찾아 온 것이다. 아무래도 부당하다는 사실은 소고기로도 지울 수 없었다. 대신 정당으로 지워야 하는 게 맞다.


https://brunch.co.kr/@supereunkyung/185


엿 같은 때, 를 심심치 않게 만나는 게 직장생활이긴 하다.

10년이 다 되도록 직장인으로 살아 본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다. 별다른 일로 직장 살이 어려운 건 아니고, 사람과 사람이 부딪히는 공간이라 그렇다는 정도. 크게 두 가지 모습인데, 하나는 한데 속해 있음에도 서로 다른 이해관계에서 오는 트러블이다. “기업 이윤”을 위해 모인 사람이라는 공동의 목적(차마 사명감이라 할 수 없다. 사명감이라 썼다면, 그건 거짓이기 때문이다.)을 가지고도 내 잘못이 아닌 당신 잘못, 당신네 팀 잘못만 탓하기 급급하다. 어린 내가 보기에도 어린 모습이다. 상식과 상식이 충돌 할 때도 있다. 한 사람은 하나의 상식이다. 내 상식, 네 상식, 김상식, 다양한 상식이 모인 집단이 또 직장이고.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보통은 상식적이나 드물지 않게 만나는 몰상식. 나는 이 주제로도 글을 쓴 적 있다. 소소하게 엿스러운 때를 만난 날이었다.


이번 엿은 처음 본 맛이다.

알수록 드러나는 것들이 있다. 사회생활 좀 해본 나라, 10년 동안 배운 눈칫밥이 쌓여, 독서하는 내가 되어 알게 된 것이다. 이제야 보이는 것이기도 할 텐데, “부당하다” 느끼게 만든 일련의 해프닝들이 토요와 일요 내내 떠돌았다. 감정은 적나라하게 밝히면서도 더 많은 진실은 이야기 할 수 없다. 장편이 될 것이기도 하거니와, 딱 여기까지가 작가인 내가 할 수 있는 표현 전부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어쨌거나 여기 월급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두 세 줄로 짧게 쓴 편집 본은 다음과 같다.

주의 욕심이 종의 피해로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다. 자기 배 불리는 데 쓰여진 종의 희생이, 자산 대부분이 은행 부채라는 나와 같은 평범한 우리에게 피해가 되고 있다. 바라시던 조금만 더, 로 아름다울 수 있던 당신의 유종은 이미 많은 것을 잃게 되었다. 갈수록 추해 보이는 게, 당신의 앞선 후회가 가시권에 들어온다. 나만 보이는 건가.


그러다 현실로 복귀한다.

쫄려도 뒈질 수 없는 내가 보인다. 어쩌면 나를 격하게 만든 건 이런 나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감정이 밥 먹여 주는 건 아니라는 걸 안다. 참아야 할 때도 있어야 하고, 쓴웃음일지라도 애써 웃어 보여야 하는 때도 있어야 하는 걸 안다. 조만간 실행해야 할 전세자금 대출로 여기 재직증명서가 필요하기도 하다. 나도 알아, 너무 잘 알아 차곡차곡 눌러 온 감정인데, 폭발하기 이 보 직전인데. 그럼에도 나와야 해, 밤사이 쌓였을 눈을 걱정하였다. 당장 오늘 출근길이 더 큰 문제였다.


오늘은 상사와 저녁 한 끼 할 것이다.

상사가 아닌 동료로서, 같은 종의 입장에 있는 사람으로서 마주할 예정이다. 진작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을 그와 공감이라도 하지 않으면, 이러다 터져버릴 거 같아 먼저 제안한 자리다.

그리고 저녁 식사까지 버텨낼 힘을 얻기 위해 여기 쓰고 있는 또 다른 내가 있다.

확실히 소고기로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다.



번외 :

분명한 건 감정은 행동을 채근한다.

선한 성공이 무엇인지 꼭 나를 통해 증명해 보이고 싶다. 선한 영향에 머물고 싶던 내가, 이제는 멋진 본보기가 되고 싶다. 보여 주겠노라고, 의미로울 때 돈은 제 가치를 하는 거라고. 객기, 호기, 치기, 전부 나에게 해당하는 말일지 모르지만 어쩐지 반드시 보여주고 싶은 날의 연속이다.


새벽 5시를 맞이하는 나의 각오는 또 달라져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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