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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은경 Apr 12. 2021

글을 쓴다는 건, 결국 나를 의식하는 행위다.

글이라는 게 그렇습니다.

무엇을 쓰던, 결국 나로부터 나오는 것이지요. 심지어 같은 책을 읽고 쓰는 독후감에도 나와 당신 하는 이야기가 다르듯, 그것은 결국 나를 반영하는 일일 것입니다. 더욱 쉽게 이야기해 볼까요. 카톡 대화에도 개인 고유만의 “어체”가 있지 않나요?(저는 주로 “가즈아!”를 말미에 붙이곤 합니다. 어디가 그렇게 가고 싶은 걸까요?^_^) 그것입니다. 당신이 쓰는 모든 말과 글은 “나”에요.


작가가 되면서는 조금 더 적극적으로 글을 씁니다.

가끔 수동적이고 싶을 때도 있지만, “매일 즐겁게 쓰자”는 쓰는 이로서의 철학을 가진 나는, 보다 동적으로 글감 찾아 주체적으로 씁니다. 매일 써야 하니까요. 즐거움에서 동력을 얻게 된 일이지만, 어쨌거나 그렇습니다.


그렇게 흰 백지를 마주한 시간과, 그 시간을 글로 채워간 날이 쌓일수록 글이라는 게 늡니다. 분량이 늘며 글발도 거세어집니다. 휘몰아쳐요. 내가 봐도 잘 썼다, 할 수 있어요. 넵, 자랑은 여기까지고. 그나저나 글에 투입 된 나의 마음과 몸과 시간과 타이핑 양이 쌓여갈수록 나는 하고픈 말이 많아집니다. 적지 않은 고민을 나의 쓰는 행위에 투입한 까닭인데, 즐거워 쓴다는 무대뽀식 주장만 하던 내가, 요즘 들어서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글을 쓴다는 건, 결국 나를 의식하는 행위다.”


무어라도 쓰겠다는 의지는 “나를” 보게 합니다. 그것은 두 가지 방법으로 이루어지죠. 하나는 써야한다는 다짐에서 오고, 또 다른 하나는 쓰고 싶다는 행복에서 옵니다. 다짐에서 오는 글은 이렇습니다. 아주 사소하게 시작해 “나 오늘은 무얼 했지”, “그래서 어떠했지”, 그저 흘려보낼 뻔 했던 “하루에도 나는 얼마를 배웠는지” 떠올립니다. 그리고 쓰기 시작합니다. 나를 충분히 인식한 상태에서요. 이따금 전부를 드러내거나 드러내지 않아 거짓과 같아 보이는 글도 있지만, 쓰는 주체는 알고 있습니다. 이 또한 거짓이라는 것 자체를 말입니다. 어쨌거나 자기를 의식했다는 이야기의 다른 표현이겠지요.


반면 행복에서 오는 글은 이러합니다. 나는 글거리를 찾습니다. “잡히기만 해봐라. 무엇이든 쓰겠다.”라며 영화 <300>을 떠올리게 하는 이 부류는, 지나가는 개미 한 마리만 보아도 쓸 수 있습니다. 개미를 통해 나를 의식하는 꼴인데요. 저라면 개미를 통해 무주택의 설움을 보고 쓸 것 같습니다. 개미를 보니 왠지 그래요. 지나가는 이야기 하나 하자면, 쓰겠다는 사람 앞에 개미는 장편소설이 되기도 하죠.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가 그러합니다. 또 다른, 쓰고 싶어 안달 난 이는 이럴 수 있을 거 같아요. 개미를 보니 나는 주식 생각부터 나더라. 동학개미, 그 어디쯤 속한 내가 보이더라. 그래서 폭락한 나의 주식 이야기가 하고 싶더라. 풀고 싶더라. 어쨌거나 나를 보게 합니다. 쓰는 시간은 도리 없이 나와 마주 앉게 해, 나를 의식하게 합니다.


“나는, 그러했고, 그러하고, 그러 할 것입니다.”


조금 더 나은 내가 쓰는 글이길 바라는 건, 여러분에게 보이는 글 전부 진심이기를 바라는 건, 어쩌면 나를 의식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일지 모릅니다.


오늘 나의 하루도 나로 가득했습니다.

(나는 오늘도 나를 의식하며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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