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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은경 Aug 31. 2022

미완성

글쎄.


아무 떠오름 없이 끼적여 보는 게 얼마만일까. 한 두 달쯤이려나. 목적 없이 쓰는 글이 일기가 될 수 있는 한편 중얼거림일 수 있겠지만 아무튼 오늘은 그걸 하고 싶어 책상에 앉는다. 디귿과 기역 누르기가 반복되고 속은 공허한 새벽 아침. 비가 내리는 창밖은 잿빛이다.     



한동안 글쓰기보다 강연 준비에 더 치열했던 듯하다. 올 8월 어린스승과 만난 이후였으니 그래, 지난 한 달 나의 언변과 ppt 구사력은 그야말로 하늘로 솟았다. 처음만 각기 춤을 추는 버벅이지 반복을 거듭할수록 각기는 웨이브가 되고 실력은 나아지는 법이다. 그러니까 강연 대본 없인 ‘안녕하세요, 글을 매개로 창작하는 작가 손은경입니다’ 조차 읊지 못하던 내가 이제는 응용 버전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를테면 양꼬치 먹은 비건이라며 나를 소개한달지, 날씨 애드립으로 공감을 유도한달지, 청산유수, 때론 과장이 거짓되어 나올뻔한 걸 간신히 목구멍으로 막고 넘어가는 순간까지 생겼으니. 글이 나자신을 앞설수록 진실이 희석될 여지가 있다는 걸 말에서도 배울 뿐이고, 말을 멈추고 글을 써야겠다는 새벽녘 다짐은 손과 입의 밸런스를 맞추기 위한 노력임에 다름아니다.     



어제는 문화도시부평 주최 기후위기와 비건에 대한 강연이 있었다. 굴포천에 있는 어느 아늑한 분위기의 카페 저녁 7시였다. 하나, 두울, …. 속으로 헤아리니 스무명여 청객이 왔다. 근처 사시는지 편한 차림이었고 손에 들린 우산은 비에 젖어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전날 밤 꾹꾹 눌러가며 다림질한 연분홍 체크 셔츠가 습기에 눅눅해졌다.     



10분 뒤 강연 시작할 예정이라는 진행자 공지에 무척 고요하던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따금 왼쪽 윗가슴에 오른손 가져다 대어 심장 박동을 체크하기도 한 건 나만 알 테다. 나대지 말라고, 프로답게 굴라고. 팔딱이는 심장을 손으로 누르던 짓이었다는 것도 나만 알 것이다.



하며 반복이 익숙해지지 않는 순간도 있다. 낯설고 오그라들고 지금 만큼은 연기처럼 빠르게 날아가 버렸으면 하는 순간. 관계자가 나를 ㅇㅇㅇ한 책을 낸 작가라 소개하며 할아버지가 지어준 이름 석자를 부를 때, 그녀 옆에 선 나는 살짝 시선을 아래로 떨군 채 인사할 것을 준비하고 있다. 90도 각도는 오버 같아 100도 정도로 굽힐 허리를 마중하는 자세다. 큰 박수로 맞아달라는 그의 마지막 멘트와 함께 나는 곧장 허리를 숙이고 와주심에 감사를 전한다. 여전히 심장이 법석이다.     



앞엔 다양한 연령의 그들이 앉아 있었다. 그들 나를 향해 있었으니 대면하고 있던 셈인데, 옆에서 보고 뒤에서 본 것과는 달리 표정이 있어 또렷하다. 감정이 생생히 전달된다. 얼굴의 수만큼 여러 사람이 있었다. 푸근한 미소를 내어주는 이 있는가 하면 급한 메시지라도 온 듯 허벅지께 둔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이도 있었고, 의자에 앉아 다리를 들썩이는 초등 친구도, 맨 뒷자리에 앉아도 가장 돋보이는 흰 머리의 어르신도 계셨다. 청객과 마주하자니 비로소 접속한 느낌이 들며 느슨해졌다가 다시 쫄깃해졌다가를 되풀이했다.   


  

다행히 쿵쾅쿵쾅 소동이던 심장은 5분 안에 제 박동을 찾았다. 마스크에 가려 있어도 볼 수 있던 그들 미소 덕에 한결 안정되었고 이후론 잘 기억은 안나지만, 무의식이 뱉은 말들이 꽤 나쁘지 않았던 느낌만은 믿을 수 있다. 다소 흥분하기도 했고, 중간중간 되지도 않는 개그를 치기도 했으며, 우리는 함께 경악하고 같이 박수를 쳤다. 여기까지가 1시간 10분간 벌어진 나의 강연 기억이다. 준비는 길고 몰입은 짧다.

(…)     



*

짧은 한 편을 마치기도 전, 남편 도시락 차릴 시간이다. 어제의 영화는 오늘의 일상과 다르다. 또 뭘 차려주나. 새로 배달 온 당근, 감자, 두부, 도토리묵, 어린잎, 김밥 김, 단무지, 우엉조림을 일열 종대로 머리에 그려놓고 적당히 조합해 본다. 사소한 고민을 신중하게도 한다. 그러니 오늘은 두부 강정과 우엉조림을 싸 보내야겠다. 그나저나 케첩이 남았는지. 벌써부터 케첩 다 떨어졌음 어쩌나, 하는 조바심으로 일상을 난다. 화요의 영광을 뒤로 수요일 아침부터 빌라 짓는 소리가 한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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