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손은경 Oct 06. 2022

공장식 건강검진

단식 24시간을 견딘 다음 날, 검진이 있었다.     



손은경님 ㅇㅇㅇ검진 센터입니다. 10/5(오늘)은 고객님의 검진일입니다. 금일 안내 받은 시간에 내원하시면 편안한 검진을 받을 수 있습니다. 부득이하게 안내받은 시간보다 조금 늦으셨더라도 서두르지 마시고 내원하시면 검진 가능합니다. 어렵게 계획하신 검진 미루지 마시고 공복만 유지하셔서 내원하시기 바랍니다.     



예약 후 실제 검진 일까지 몇 번의 문자와 전화를 받았나 모른다. 그것은 마치 네가 와주어야 우리 검진 센터가 존재한다는 것처럼 그러니 부디 와주라주라 하는 말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렇게 02로 시작하는 그 센터 전화번호를 외우게 되었을 즈음 검진일이 되었다.     



오전 10시 30분경 방문한 센터는 검진자로 북적였다. 오늘만 날인가. 그들은 나와 비슷한 보챔을 받았을 것이었다. 1층에서 접수를 마치니 흰 가운을 입은 직원이 다가왔다. 검진표를 들고 우왕좌왕하는 검진자에게 가야 할 곳을 가이드 하던 직원이었다. 아무것도 표시도 되어 있지 않은 내 차트를 보더니 8층으로 올라가라 했다. 공장식 검진이 시작되는 줄도 모르고 나는 다소 긴장한 마음으로 엘리베이터를 탔다. 검진은 똥줄타게 한다.     





나 같은 어리바리 검진자들이 엘리베이터에서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8층이었다. 도착해 어디로 가야 하나, 두리번대니 8층 가이드 요원인 흰 가운 입은 직원이 다가와 외쳤다.     



“여기서 열쇠 가지고 좌측 탈의실로 들어가세요. 옷 갈아입고 나오시면 됩니다. 속옷은 벗으시구요.”     



내가 받아든 번호표는 103이었는데 탈의실 라커 번호이자 이 공장식 검진에서 나를 부르는 번호기도 했다. 후에 나는 103번으로 확인되었다. 브라가 없는 채 가운만 입고 나온 나는 공간에 녹아들었다. 어서 끝나고 첫 음료만 마시기를 바라며 직원의 안내에 따라 첫 검진을 하러 갔다.     



혈압이었다.

103번 맞으시죠? 오른팔 넣으시구요 가만히 앉아 계세요. 1분쯤 흘렀을까. 위위윙 하고 기계가 혈압의 고와 저를 재더니 수치로 이를 가리켰다. 아주 무미하게, 남색 간호복을 입고 있던 간호사A가 수치를 적더니 그 즉시 체중계로 보냈다. 혈압 측정기에서 다섯 걸음쯤 떨어진 곳으로 자리를 옮기니 발 닫기가 무섭게 간호사B가 말했다. 여기 발끝에 맞춰 서세요. 순식간에 키와 몸무게, 내가 몸무게를 확인하는 사이 허리둘레가 재어졌다. 세 걸음쯤 더 가서 안구 측정하는 간호사C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두리번거리는 내게 여기 오세요, 하고 재촉하듯 외쳤다.     



3, 5, 2, ….

5, 7, 9, ….     


“양쪽 1.2요.”     



고작 5분도 안돼 10월 5일 현재의 혈압과 키와 몸무게, 허리둘레 그리고 시력까지 알게 되었다. 그 뒤로도 비슷한 속도로 청력을 재었고 하나 아래층으로 내려가라고 하여 몇 가지 검진을 더 받았다. 흉부 촬영을 했던 듯하고 나머지는 기억에 없다. 모든 일사천리였다는 것과 103번이 맞느냐는 확인을 받은 것 외엔. 그렇게 대망의 하이라이트, 자궁경부암 검진 순서가 도래했다. 여성의학과로 가라는 직원의 안내에 윽, 소리가 나왔다.     


“치마 뒤쪽 완전히 재끼고 뒤로 바싹 앉으세요.”     



여기선 입고 있던 바지 말고 부직포 같은 일회용 치마를 입고, 그것도 팬티 없이, 있어야 한다는 건 지난 검진을 통해 기억하고 있었다. 바닥에 몰래카메라가 설치돼 있을 것 같은 이상한 피해망상에 혼란스러워하던 것도 대충 떠올랐다. 굉장히 휑하고 마음은 어수선한 시간을 여성의학과에서는 버텨야만 한다. 그러나 속내와 달리 의연한 척했다. 앞서 본 할머니와 같은 치마로 갈아입고 나와 살짝 다리를 벌린 채 대기실에 앉아 기다렸다. 이 또한 지나가리. 처연해지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103번이 불렸고, 나는 어떤 방으로 이끌려졌다. 왼쪽과 오른쪽 다리를 거치할 수 있던 소파 같은 의자가 놓여있었다. 거기 다리 거치하고 앉으라고 했다. 이 상황까지 처연할 수는 없었다.      





자궁경부암 검진을 앞둔 여성 사이 떠돌던 말이 떠올랐다. ‘그거 받느니 차라리 병에 걸리는 편이 나아….’ 다소 부끄러운 나의 몸짓은 소극적이기만 했다. 간호사가 말했다.     



“바짝이요. 엉덩이 더 밑으로 내리세요. 더, 더.”     



그의 목소리는 다급해 보였다. 지체하지 말고 확실하게 자세하라는 듯한 그의 언성에 소파에 앉아 있던 몸이 기울어지듯 나는 점차 누운 자세가 되었고, 그럴수록 나의 소중이는 간호사에게로 가까이 갔다. 부르르. 수치감이 내는 소리 같았다. 자세가 발라지자 간호사는 의사 선생님 부르겠습니다, 했다.     



나는 검진을 위해 의자에 거치한 두 다리로 어쩔 수 없이 쫙, 다리를 벌린 채 의사만 기다렸다. 내뱉을 수도 없는 말을 입안에 오물거리며 온몸으로 수치를 이겨냈다. 내 것도 그들의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앞서 다녀간 할머니의 것과 대기실에 앉아 기다리던 뭇 사십 대 여성의 그것과 곧 내 몸을 찌를 그녀의 것이 다르지 않을 것이다. 생물책에서 봐왔던 그 그림과. 고로 나는 그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 괜찮다, 이 또한 지나가리. 씁후씁후. 글로 써야겠어. 이 순간을 잊지 않고 글을 써야겠어.     



“검진 시작합니다.”     



의사의 선고가 있고 차가운 플라스틱 같은 것이 훅하고 들어왔다. 그저 이 순간이 어서 지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은 치과에서 스케일링 받을 때와 같았다. 그래서인지 끝날 듯 끝나지 않았다. 고개를 뒤로 젖히니 천장이 있었고 앞쪽으로 어렴풋이 커튼 같은 가림막이 보였다. 이 순간만 회피하고 싶어 나는 왼손을 두 눈에 가져다 댄 채 지긋이 눌렀다. 피하고 싶을수록 손에 힘이 들어간다.     



여성과 검진을 마친 나는 다음 가동장소에 해당하는 채혈 센터로 갔다. 거기엔 일곱 명의 채혈 담당자가 있었다. 데스크에 있는 직원에게 검진표를 건네주니 검진표를 뽑고 기다리란다. 동일한 가운을 입은 남녀가 나란히 의자에 앉아 자기 번호가 불리기만을 바라며 번호판만 쳐다보았다. 그리고 고작 2분쯤 지나 내 차례가 되었다.     



“채혈할 거예요. 주먹 쥐시구요. 따끔합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둘둘 고무줄 묶은 왼팔에 정말 따끔한 것이 들어왔다. 쫄 틈이 없어서 쫄지 못 했다. 앞을 보니 나처럼 혈압 재듯 왼팔을 채혈 담당자에게 내민 채 오른쪽만 응시하던 검진자가 일곱이었다.     



“끝나셨어요. 이제 집에 가시면 돼요.”     



103번에서 해방되는 순간. 말이 끝나기 무섭게 텀블러에 싸온 두유 쑥 라떼를 마셨다.     





오늘은 공장식 건강검진 체험을 했다. 다소 독특한 경험에 쓸 거리가 생겼지만, 공장식인 덕에 하루 몇 명을 수용할 수 있던 걸까, 쑥 라떼를 마시며 이런 것 따위를 생각했다. 공장식이라 친절하기는 다소 힘들겠다는 이해와 검진자 개개인에 대한 세세한 신경은 기대도 말아야겠다는 포기. 검진도 공장식은 피로하다는 것을 느끼며 집에 돌아가는 버스를 탔다.


사람들이 번호로 보였다.


작가의 이전글 기는 알고리즘 위에 나는 인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