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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은경 Oct 25. 2022

지나간 연인에게

남편 훈이 보지 않을 걸 알아 쓸 수 있는 글들이 있다. 사랑에 관한 것으로 과거의 것들을 말한다. 그렇게, 나는 이따금 지난 사랑들에 대해 쓴 뒤 누구나 볼 수 있도록 웹 사이트에 게시를 한다. 그들이 그립다거나 그래서 재회를 바란다는 건-훈 앞에 맹세컨대-결코 아니고, 잊고 있던 감정이 추억이 떠올라 뭐라도 쓰고 싶어져서다. 훈 말고 ex로 불리는 걔들이 볼 수도 있겠지만 상관하지 않는다. 오히려 널리 보여지도록 꼭대기 저 위에 글을 꽂아 놓기도 한다. 일종의 작가적 소명의식이라 믿는다.     



가상체험을 하는 것처럼 꿈이 재미있는 잠이 있다. 색다른 상황, 그래서 꿈. 그런 날은 암막커튼을 치고는 가급적 오래, 뜨는 해를 무시하고라도 자고 싶어지는 것이다. 훈이 경주로 컨퍼런스를 간 첫 밤, 홀로 자게 된 어젯밤. 꿈을 꾸었다. 꿈에는 정우가 나왔고 나는 걔랑 사귀고 있다.     



*

정우는 한때 나의 연인이었다. 가장 특징적으로 그를 기억하는 단어는 ‘부산’이다. 나랑, 짧게 사귀었던, 부산남자. 그게 지금 그 아이를 기억하는 전부다. ‘정우’ 했을 때 경상도권 그 지명이 떠오르는 이유는 부산사람과 연애는 참 별로라는 인식을 심어준 장본인이 걔라 그렇다.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였다. 부산남자와 첫 연애였고 몹시 외롭다 끝난 사이었기에. 그래서일까 걔 이후로 둘셋 부산 토박이랑 연애 할 기회가 있었으나 역시나 짧았고 다시는 입에 올리고 싶지도 않을 만큼 쓴 만남이었다.     



유독 연약해지는 부분이 있다. 그것만 보면 연하고 약해진다. 연약함은 입안을 맴돌다 내 혀를 잘라버린다. 혀가 짧아지더니 일종의 콧소리 같은 것이 나온다. 한없이 약해져 애기가 되어버린 내가 있다. 시공을 초월해 나를 유아기로 만들어 버린 것은 바로 눈웃음이었다.     



나는 눈웃음 주는 이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던 것 같다. 눈웃음은 보통 ‘치다’라는 동사와 함께 쓰이는데 여우가 꼬리를 ‘치는 것’만큼 치명적이라 붙은 관용구가 아닐까 생각한다. 정우는 웃는 모습이 매력적이던 대학 동기였다. 까무잡잡 그을린 얼굴에 안경을 썼고, 실은 그 아이가 한 가장 큰 실수는 고등학생 시절, 나를 맨 앞줄로 이끌던 국사 선생님과 너무도 닮았다는 것이었다. 그가 부산으로 전근 온 것이라 오해하기도 했으니까. 국사 선생님과 정우는 하회탈 같은 눈웃음이 있었다. 결코 남희석 같지 않은, 보는 이를 연약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들이 나를 의식해 고꾸라진 반달 모양으로 웃은 건 아니었겠다만 나는 그게 늘 신경 쓰였다. 어떤 날, 나는 눈웃음이 갖고 싶어 거울 앞에 서 억지 미소를 지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유전자의 발현에 불과했던 것처럼, 연습하는 번번이 실패했고 결국 눈웃음을 보유한 정우에게 고백 할 수밖에 없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그의 고백을 유도할 수밖에 없었다.     



*

꿈에 정우는 부산에 집을 샀다. 시멘트로 만들어진 집이었는데 군데군데 붕괴의 자국이 남아있던 허름한 건물이었다. 전체도 아니고 한 (601)호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를 매우 사랑했다. 내가 이 집을 어떻게 마련했는데. 건물 내부를 수십 개로 나누었기에 가질 수 있게 된 그 한 칸은 그의 긍지처럼 보였다. 서른 넷, 어찌어찌 들어간 대기업에서 아끼고 모아가며 쓸 것도 쓰지 않아가며 그렇게 그는 부동산을 구매했다. 소유주라기엔 비교적 어린나이였지만 나는 그게 못마땅했다. 정우는 늘 나보다 저금이나 부동산 같은 자산 따위가 우선이었다. 직장이 그 아이의 유일한 벌이었고 그래서 번 것을 죄다 저금했고, 그러니까 걔 여자친구인 나는 집 한 칸보다 못한 존재였다.     



마침내 연락을 끊고 그에게서 달아나기로 했다. 정우를 이해하기 위해, 정우에게 상처가 되지 않기 위해, 나만 알아듣도록 속으로 질문하고 답하며 나를 달래고 어르던 시간이 제법 길었다. 정우는 이런 나를 알 리 없었다. 바뀔 것이라 믿었으므로. 몹시 작은 힌트, 돈보다 네가 소중해 라는 직접적인 언급은 없었어도 내가 알아차릴만한 그 무언가, 부산 츤데레임도 모두 감안할 테니 제발 보여주기를 바랐지만 여지없이 무너졌다. 그 낡고 오래 된 집을 빠져나와 배회한다. 정우가 나를 붙잡으러 왔다. 이미 그와 헤어질 결심을 완성한 상태다. 그를 돌아보며 한 마디 한다.     



“난 갈 테니 너의 긍지와 잘 살아봐.”     



*

일어나니 신기루처럼 모든 것이 흩어졌다. 전부 허구였으나 지금도 걔의 연인이었다면 겪지 말라는 법도 없을 그런 스토리였다. 쪼다. 조소를 보내며 일어나 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좋은 아침이라고 잘 잤느냐고, 나의 단 하나 네가 보고 싶다고 말했다.     



드문드문 남는 잔상으로 글을 써 꼭대기에 꽂는다. 훈이 보아도 어쩔 수 없고 정우가 보아도 괜찮을, 이 글은 곧 사랑을 했던 뭇 여성과 남성에게 가닿을 테다. 문득 정우가 잘 지내고 있을는지 아련해진다. 그리고 변하지 않았다면 여전히 혼자 일거라는 걸 알 것만 같다. 사랑 앞에, 뜨거울까 차가울까 모두 잃게 될까, 하는 겁으로 소극적인 이에게 충만한 사랑을 느낄 이는 아무도 없다. 그게 너와 내가 헤어진 진짜 이유라고, 이제는 말해줄 수 있지만 아무것도 허락하질 않는다.     



그저 잘 살길, 그럼에도 비슷한 타인과 만나 사랑이라는 것에 빠져 보기를

세상은 단 한 사람으로 인해 존재하기도 사라지기도 한다는 걸,

내가 훈을 만나 배운 것처럼 네게도 그런 운이 따라주길     


경험이 되어준 그에게 감사하며 글을 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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