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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은경 Nov 30. 2022

그곳에 두고 온 사람이 있어서요

제2화

그렇게 3주가 흘러 훈을 배웅하기 위해 인천공항에 가는 날이 되었다. 서로를 전부 알기엔 너무나 짧은 만남. 매일 만나 시간 구석구석을 함께 했지만 시작하는 연인에겐 불충분하기만 했다. 탑승하기까지 절반은 울었고 절반은 훈의 다짐을 받아내는데 보낸 것 같다. 이대로 훈이 핸드폰 번호를 바꾸어 버리거나 연락을 차단해 버리면, 영화 <비포 선셋>처럼 한밤의 꿈과 같은 사이가 될 수밖에 없다. 우리 각자 뿌리 박힌 곳과, 그 두 곳의 간격과, 시간 차이는 훈이 비행기를 타는 순간 정말 무시 못 할 것들이 되어버릴 것이라는 걸 직감했던지도 모른다.     



훈을 출국 심사대로 들여보내며, 애써 웃으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날은 깊은 잠을 잘 수 없었다. 그저 훈과 재회할 것만 기다리는 밤이었다.     



다음날 아침, 훈에게 메시지가 왔다.     

“자기야 나 도착했어요. 이스탄불 집에 도착해서 다시 연락할게요.^3^”     



밤새 하늘을 날던 비행기에 무슨 일 생기진 않을까, 훈이 핸드폰을 잃어버리면 어쩌나, 그럼 나랑 연락은 어찌 할 수 있을까, 할 수 있는 모든 파괴적인 생각들을 하며 맞은 아침 출근이었다. 그렇기에 훈에게서 온 무사귀환 문자는 그날의 기쁨이었다.     



인천공항에서 훈과 커피를 마시며 약속한 게 있었다. 그해 3월엔, 훈이 사는 그곳에 가기로 한 것이다. 훈이 한국 복귀하기로 약속한 6월까지 참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러던 2월 일이 터졌다.     



“신종 전염병 COVID19 창궐.”     



감염, 그것은 위기였다.     

각종 전염병을 보고 듣고, 실제 감염도 되며 자라왔다. 그들 중 대다수는 낮은 가능성의 것, 그러니까 감염 가능성이 낮거나 치사 확률이 낮은 바이러스들, 혹은 이미 치료법을 개발해낸 것이었고 그래서 나는 새롭게 떠도는 이놈도 비슷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다른 전개가 펼쳐졌다. 두려움이 세상을 잠식해, 온 나라는 ‘코’로 시작하는 놈에 아연실색했다. 그렇게 접촉을, 만남을, 국경을 닫아 버리기에 이르렀다. 3월 출국을 앞두고 항공사로부터 공지 문자가 왔다. 튀르키예 정부 지침으로 외국인 입국이 불가능합니다. 그러기까지 매일 뉴스를 보고 확진자 추세와 정부의 대응 등을 예의주시하던 나였다. 상황은 점점 심각해지기만 했다. 초창기, 우리는 서로를 바이러스 취급하기에 이르렀으며 접촉만으로 감염을 의심하기도 했다. 인간은 바이러스가 아니었으나 결론적으로 바이러스가 되어 있었다.     



자국민 지키겠다는 그들 방어에 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훈은 그곳 국민이고, 그가 아프기를 바라지 않았다.

나는 훈에게 갈 수 없었고, 훈 역시. 한국에 올 수 없었다. 한국 정부는 하늘길 자체를 막지는 않았지만 비자 면제 협정국과의 협정을 중단해 버렸다. 튀르키예와 한국도 다르지 않았다. 이후 비자 소지자만 한국에 입국 가능하도록 했고, 비자를 소지하기 위해 엄격한 절차를 거쳐 한국 입국이 반드시 필요한 이들에게만 발급했다.     



그때로 나는 매일 법무부 외국인종합센터 1345에 전화해 무비자 언제 협정이 재개되는지 물었다. 정성껏 쓴 메일을 대사관에 보내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서울에 사는 선량한 시민입니다. 튀르키예에 두고 온 사람이 있어 그를 만나고자 하는데 아시다시피 양국에서 외국인 입국을 막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는 바이러스가 아님에도 불구하고요. 무비자 협정이 중단된 것도 압니다만 혹 언제쯤 재개될지 알 수 있을까요. 아님 무쇠처럼 단단한 그 절차를 거치고라도 비자를 발급받을 수 있는 길은 없을까요. 방법이 있다면 무엇이든 해볼 생각입니다. 간절함이 메일을 통해 가닿기를 바랍니다.     



그때만큼 절절하게 호소해 본 적이 있을까. 그리고 온 답장은 ‘애석하게도’로 시작하는 한 편의 위로였다. 매일 어서 이 바이러스가 종식되기를, 서로를 바이러스 취급하는 이 상황에서 벗어나기를 바라고 바랐다. 자연 앞에 인간은 무력했다. 그 무력감은 나를 지치게도 했다. 깊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 가슴 치는 날이 잦아졌다.     



사랑하는 우리가 함께 보낼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은 영상통화로 얼굴을 마주하는 것, 대화를 나누는 것. 그뿐이었다. 그날도 우리는 한국 시간 새벽 3시, 튀르키예시간 밤 9시까지 통화하고 있었다.     





(계속)



이 글은 네이버 연재 중인 글로, 원본에 해당합니다.

https://naver.me/58FhjPz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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