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손은경 Dec 10. 2022

그럼 나랑 결혼할래?

제3화

“베이비 졸렵지 않아요? 이제는 자는 게 어때?”

“몇 시지? 헉! 벌써 새벽 3시야? 아니야 괜찮아요. 영상통화 더 할래.”

“흠.”

“왜요?”

“아니에요. 베이비 내일 회사에 가야하잖아요. 지금부터 잠에 들어도 4시간만 잘 수 있어요.”     



전부 사실이었다.

당시 나는 한국의 낮과 튀르키예의 낮, 두 개의 낮을 살았다. 심지어 직장인이던 내가 삶 두 개를 살겠다 자처할 수밖에 없던 건 한국이 튀르키예보다 6시간을 앞서 있어서였다. 해가 뜰 때면 나는 주섬주섬 어제 입던 옷이라도 대충 주워 입고 출근길에 올라야 했다.



그렇게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회사에 묶여 있었다. 퇴근 후부터 늦은 새벽까지(어떤 날은 이른 새벽까지)만 내 시간으로 쓸 수 있었고 그래서 훈은 평상시 생활 패턴을 유지할 수 있었다. 대신 스페인에 시에스타가 있다면 내게는 쪽잠이 있는 것처럼, 퇴근 후 틈을 타 짧은 잠을 취하기도 했다. 당시 나의 하루는 영락없이 영상통화를 위해 세팅되었음이 분명했다. 훈과 얼굴 마주해 대화하던 그 시간이 아니었다면 나는 병에 걸렸을지 모른다.     



평일 낮, 쉬는 시간을 틈타 외국인 종합 안내센터 1345에 전화하는 것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혹시 바뀐 지침 없나 하고요. 어때요. 이전으로 돌아갈 기미 있나요. 최근 신약도 개발 중이라고 하고 거의 완성 단계라고도 하던데. 방법 없을까요. 시간이 지나면 좀 나아질까, 그럼 우리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역시나 그날도 대답은 두 국가 모두 무비자 입국 금지라는 거였다. 네, 알겠습니다. 통화 종료 뒤 헛헛한 마음을 감출 수 없어 한동안은 회사 건물 비상구 계단에 쭈그려 앉아 있어야 했다. 후우-하고 내신 한숨이 18층 건물 비상계단에 메아리 되어 돌아왔다. 그러다가도 문득 이렇게 약해지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고작 바이러스 때문에 훈을 잃고 싶지 않고 훈 또한 마찬가지. 전염병이 창궐한 지도 5개월이나 지났다.   


  

나아질 거라는 희망이 점점 빛을 잃어가는 순간이 왔다. 2020년 6월이었다. 영상통화 앱에 훈의 얼굴이 보이자마자 고정적으로 내뱉던 오프닝 멘트가 있었다. 그곳 분위기는 어때?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양국 바이러스 동향과 바뀐 정부 지침은 없는지 파악하는 거였다. 어제보다 감염자 수가 미세하게 줄어들었다고 하면 안도를 보내며 이러다 종식되겠다고 기쁨을 머금었고, 한편 밤새 뭔 일이나 있었는지 확진자 수가 급등한 날이면 거짓 아니냐며 현실 부정을 했다. 그랬던 우리 대화가 어느 날부터인가 달라졌다. 우리는 묻지 않았고, 그것은 보통 좌절과 함께라 오히려 사랑에 방해가 되는 날이 많았기에 그런 거기도 하지만, 아마 어느 순간 우리는 현 상황에 대해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 같다. 못 만나고 못 만진 지 6개월 차에 접어들었다.





그때 나는 결정이라는 걸 해야만 할 것 같았다. 그날도 1345 외국인 종합 안내센터에 전화해 변동된 지침이나 추세 따위를 물었는데 나의 질문은 달라져 있었다. 안녕하세요, 비자 면제 협정 재개 되었나 궁금해서요. 그렇죠, 아직이죠. 변함없는 거지요, 하고. 체념은 곧 결정을 의미했다. 퇴근 후 저녁 먹고 난 뒤였으니 한국으로 밤 8시에서 9시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시시콜콜한 서로의 일상을 공유하다 나는 불쑥, 훈에게 말하기에 이른다. 불현듯 지금 꼭 너에게 이 말을 해야겠을 때. 주저할 필요가 없어 아무런 용기조차 필요 없는 말일 때. 뇌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커다란 고백’을 평상시 ‘안녕’하고 인사 건네듯 가볍게 툭 뱉게 한다. 훈을 불렀다.     



“자기야.”

“네, 베이비?”

“자기야는 나랑 결혼할 수 있어?”     



훈이 한국에 있던 기간,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가 어떤 사람인지, 하물며 내게 어떤 사람으로 존재할지 나는 모를 수가 없었다. 훈은 내가 세상에 없다고 줄곧 믿어온 종류의 사람 같았다. 그의 눈짓 행동 말 모두엔 진심이 묻어 있었다. 다소 순박한 시골 청년 같았다고 표현하면 한국 정서로 그를 이해할 수 있으려나. 그런 그와 연애하며 나는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을 비로소 배우기도 했다.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그를 위해 발가벗겨져도 웃음 지을 수 있겠구나. 훈을 만난 뒤 훈은 내게 전부였고 그 전부와 함께일 수 있다면 모든 할 수 있다. 심지어 포기도 할 수 있겠다. 결코 무모하지 않은 용기가 생겼다.      



“당연하죠! I have a no doubt about you as a my life partner. 내 사랑.”

“그럼 결혼할래?”     



그럼 결혼하자는 말이 나왔다. 우리가 재회할 방법은 그것뿐인 듯하다고, 대사관 확인에 의하면 비자 발급은 아주 특별한 상황만 발급되며 여기엔 F6(결혼 이민 비자) 포함이라 더라고. 결혼할까 말했더니 되돌아 온 당시 훈의 반응이 떠오른다. 단 0.0001초의 망설임도 없었다. 좋아, 뭐부터 준비하면 되. 우리는 종국엔 서로의 라이프 파트너가 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 2020년 1월 그날, 그 시간 우리는 만나기로 되어 있던 것뿐이라고 나는 두고두고 믿는다. 인연이라 부르는 그것.     



그렇게 당사자 둘의 마음을 소 심플, 소 이지하게 확인했다. 다만 부모님 의사는 묻지 않은 상태였다. 아들이 눈 떠 있는 종일, 주구장창 한국에 있는 어떤 여자와 통화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터키아빠는 아들 훈이 본인은 한 번도 만나지 못한 그 한국인 여자를 몹시 사랑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처음 보는 아들 모습에 깨나 낯선 동시에 서운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훈의 모습을 못내 못마땅해 했다는 건 나중에 들었다. 영상통화를 마친 튀르키예 시간 밤 9시쯤이면 훈은 아빠와 크게 다툰다고 했다. 다소 반대가 있다고 했다. 다름 아닌 차이 극복에 관한 염려였다. 다른 문화에서 자란, 너보다 6살 많은, 그렇게 생긴 모든 차이를 극복할 수 있겠니.     



부모라는 거대한 장벽이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계속)




이 글은 네이버 연재 중인 글로, 원본에 해당합니다.

https://naver.me/58FhjPzc




매거진의 이전글 그곳에 두고 온 사람이 있어서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