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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은경 Feb 01. 2023

국제부부는 타인의 관심이 된다

제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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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갓 결혼하고 난 뒤, 나는 빗발치는 질문세례를 온몸으로 받아 내느라 했던 말과 했던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해야 했다. 국제부부는 타인의 관심이 되고 그것은 막연한 환상에서 비롯한 것. 미지의 세계란 그런 것. 그들에겐 외국인과의 연애나 결혼에 대한 로망이 있는 듯 해보였고 일부는 나를 비려 자신에 이입해 보는 일을 서슴치 않았다.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한 듯, 아련히 빛나는 눈망울을 보며 알 수 있다. 만화 세일러문에서 본 듯한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식을 올리지 않은 우리였기에 친한 개개인에게 따로 결혼 소식을 알려야했다. 청첩장 없이 결혼을 알리기란 마이크 없이 무대에 선 것과 같다. 샘플이라도 하나 만들었어야 했나.     



“언니 나 결혼했어! 놀랐지? 결혼식은 따로 안 할 예정이라 말이야. 어떻게 인사하면 좋을지. 그래도 소식은 전해야 할 거 같아서.”

“우와, 결혼 축하해. 우와우와. 진짜 신기하다. 외국인? 튀르키예 사람하고 결혼하다니. 예상은 못했지만 너라면 그럴 수도 있을 거 같아. 다소 너라서 가능한 일 같아. 그나저나 진짜 축하해!”     



무엇이 나라서 가능한 일인지는 모른다. 다만 용감하게도 사랑을(사랑만으로 모든 걸) 받아들였다는 점에서였으리라 짐작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말했듯, 다소 나였기에 가능했던 결혼은 그들 자신이었다면 불가능했을 거라는 말로 들리기도 했다. 여하튼 국제간 결혼이 국내간 결혼보다는 고려해야 할 덩어리가 크고 무겁다는 사실엔 공감한다. 둘 중 하나는 삶의 터전을 바꿔야 하고, 것도 모자라 그곳에서 살아남아야 하고, 거기서 언어와 문화라는 장벽에 부딪히기도 한다. 사랑이 무엇이기에 기존의 나를 버려 새로운 나로 태어나겠다고 결정하는 일. 거센 파도에 온 몸을 내맡기는 일. 그러나 그만한 가치가 있는 사랑, 그게 더 애틋해 보였는지 모른다. 그게 그들에겐 부러움이었는지 모른다.     



“어떻게 만났어?”     



보통은 경위를 파악하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어쩌다 만났는지를 묻는다. 그러고는 둘 중 누가 먼저 고백했는지 무엇이 그토록 매력적이었는지, 꼭 자신이 느끼고 싶은 감정이듯 샅샅이 긁는다. 모 오픈 펍에서 만났다고 했다. 그날 굉장한 오지라퍼에게 공연한 꾸지람을 듣고 ‘너나 잘하세요’ 반박하지 못한 나에게 화가 나 소주맥주를 섞어 마신 날이었다고 했다. 취해서 비틀대는 쪼그만 한국 여자애가 안쓰러워 훈이 부축해주었는데, 술에 깬 순간, 그가 자비로운 부처 같았다고 이야기해주었다. 동시다발적으로 서로에게 관심을 보였고 될 것은 쉽게 된다고도 말했다. “꺄악~~~ 인연인가봐 인연!” 지르는 소리가 내 귓가를 때린다.     



“소통은 어떻게 해?”     



그 다음으로 묻는 질문이었다. 그럼 소통은 어떻게 하냐는 것이다. 영어로 한다고 했다. 영어로 한다고 하면 보통 두 가지 반응이 되돌아온다. 올, 너 영어 잘하는구나, 하나. 그래도 모국어만큼 깊은 대화는 어렵지 않니, 둘. 일단 한국과 튀르키예는 알타이 어족을 사용하므로 어순 체계 등 언어 쓰임 면면이 비슷하다고 했다. 그래서 영어를 써도 둘 다 콩글리쉬처럼 쓸 때가 많고, 영어로 표현하기 어려워도 대충 한국식이나 튀르키예 식으로 말하면 꿀떡꿀떡 알아먹는다고 말했다. 물론 모국어로 소통하는 것만큼 깊은 대화는 어려울 때가 있다고도 시인했다. 그러나 그것은 언어가 달라서라기보다 문화적 경험, 가령 우리 회사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우리 회사 김부장과는 통할지언정 B회사 최부장과는 공감하기 어려운 것처럼. 그 정도이며 장애가 될 정도는 아니라고 했다. 무엇보다 사랑의 언어가 있으니 걱정거리는 못 된다고도 했다. 의성어나 의태어, 때론 서로에게 맞춰진 주파수만으로 통하는 파동이 있다. 비언어적 측면의 소통이지만 언어가 아니라는 이유로 마음을 막을 수는 없다. 사랑하는 우리에겐 언어 너머 통하는 말이 있다. 키스 한 방이면 끝난다.     





그러다 돌아온 말은 “시댁이 멀어서 부럽다.” 가기 싫어도 가야하니 마땅한 물리적 핑계, 즉 ‘멀다’는 이유로 갈 수 없고 싶은 모양이었다. 시누는 적을수록 좋고 시댁은 멀수록 좋다고 했다. 비행기 12시간을 타야만 만날 수 있는 시댁식구인데 어찌 부럽지 않겠느냐는 말도 흘렸다. 얼마간 재미있던 것은 당시 다니던 회사 부장도 시댁이 멀다는 사실에 부러워했다는 거였다. 부장은 고부간 갈등에 새우처럼 쪼그라든 상태였다. 오라는 어머니, 가지 말자는 아내, 그 사이에 부장은 늙어갔다. 시댁이 가깝다는 사실은 남자와 여자 모두에게 적잖은 피로감을 선사하는 듯했다. 내 경우 시댁에 가고 싶어 죽을 지경이라는 말은, 차마 뱉지 못했다.     



그렇게 한참 초롱초롱한 눈으로 우리 결혼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달라서 힘든 점은 없는지 짧게 묻는다. 국제부부로 사는 결혼생활 전반은 어때. 사랑이 토르에게 있어 망치처럼 역경을 부술 힘이 되어주겠지만 어쨌거나 현실이잖아. 그럴 때면 나는 말하곤 했다. 그렇지, 현실이지. 그런데 묘하게 비현실 같아. 현실이지만 현실 너머를 살고 있는 것 같달까. 나는 내가 훈을 위해 튀르키예에 가야 했어도 기쁘게 갔을 거 같고, 한국에서 쌓은 모든 것을 버려야했어도 얼마든 그랬을 거 같아(지금은 훈과 협의가 필요하지만). 그냥 훈이 현실처럼 내 곁에 있어 행복해. 현실이지만, 현실이라 더 좋아. 매일 밤 나는 왼쪽으로 눕고 훈은 오른쪽으로 누워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게 하고, 장난을 치고 한 명은 울상이 되고 다른 한 명은 깔깔대는 밤의 반복이지만 그래서 나는 좋아. 내 옆에 현존하는 훈이 있어 행복해. 고맙기만해. 확실히 나라를 넘는 사랑과 결혼은 어마어마한 일이지. 우리 사랑의 진실을 마음을 가늠케 하는 일이지.     



갑자기 숙연해진 분위기가 그들, 그들의 사랑을 곱씹고 있음을 알게 한다. 그러려고 한 말은 아닌데. 그러다 곧 정신을 차리더니 몇 가지 질문을 더 늘어놓는다. 훈은 한국음식 뭘 제일 좋아해, 훈은 한국인 뭐가 독특하데, 한국에서 이해할 수 없는 문화는 뭐래, 한국과 튀르키예 가장 다른 점은 무엇이래. 주체할 수 없는 환상과 신비가 어디까지 그들을 데리고 갈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뭘 더 물으려나, 설마 잠자리까지 물어오려나 싶었지만 그 부분은 묻지 않았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호기심 많은 점잖은 나의 사람들이었다.     




(계속)





이 글은 네이버 연재 중인 글로, 원본에 해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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