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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은경 Jan 25. 2023

제기동 신혼생활

제5화

-이전 글 : 제4화, 북한군과 한 사랑이 아니라 다행이야




그때만 해도 전 세계는 외국인의 입국을 막거나, 극도로 제한하던 시기였다. 한국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반드시 와야 할 몇몇만 들여 보내주었는데 그나마도 삼엄한 절차를 통과해야 했다. 방역 질서라고는 하지만 다소 유난스럽게도 느껴졌다. 인천공항은 그야말로 아수라장 같았다.     



저기요, 일단 여기서 기다리세요. 우주복같이 생긴 흰색 부직포를 입은 공무원이 내게 다가오던 훈을 막아 세웠다. 픽업 차량이 올 때까지 가벽 안에서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나는 그 벽 밖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사무실 파티션에 불과하던 그 벽은 경계를 나누는 기준일 뿐, 매우 허술하고도 낮았다. 우리는 그 사이로 얼굴 내밀어 대화할 수 있었다. 이 벽 너머, 6개월 만에 남자친구에서 남편으로 진급한 훈이 내 눈앞에 살아 움직이고 있다. 사이버 러버인 줄로 알았던 그가 여기 있다. 베이비, 고생했어. 피곤하지 얼른 집으로 가자. 내가 베이비가 좋아하던 맛있는 한국 음식 많이 준비 해뒀어. 우리는 파티션 위로 서로의 손을 주고받으며 애틋한 마음을 풀어냈다. 그러나 대화는 길게 늘어지지 않았다. 그때 나는 티비에서나 봤던 낯선 느낌을 감각하기도 했다. 분명 내 것인데 남의 것 같아 내 것이 아닌 기분. 이산가족 상봉과 다를 바 없다. 어렸을 때 아침마당 같은 프로그램에서 그들 오랜 시간 잃었던 가족을 찾고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반기던 기억이 난다. 내가 나의 동생 그리고 부모에게 보이는 태도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말과 행동하는 그들이었다. 형, 형이 맞습니까. 엄마 이름은 김봉자이고 우리 형은 엉덩이에 대한민국 지도처럼 생긴 몽고반점이 있었는데, 그게 당신 맞습니까. 그렇게, 어려서 남긴 흔적 하나둘을 퍼즐처럼 조각조각 맞춰가며 마침내 가족이라 입증해 냈을 때, 그들은 “혀엉!” 그리고 “아우야!”하고 얼싸안아 울었다. 어린 내 눈에 그것은 매우 어색한 포옹이었다. 진정한 타인을 대하듯, 두 가슴팍을 10cm쯤 띄어둔 상태로 안겨 있었다. 그리고 그때 봤던 것처럼, 시간이 나와 훈 사이에 미묘한 틈을 형성하고 있었다. 당분간 시간의 공백을 해결할 밀착형 생활이 필요해 보였다. 그놈 바이러스가 앗아간 우리의 시간이었다.     



그리움에 새벽마다 일어나 가슴을 퍽퍽 치다가 잠에 드는 일, 훈을 떠올리며 줄곧 내가 하던 행동이었는데 어쩐지 6개월 만에 만난 훈은 낯설다. 손을 잡는 일도 허락을 받아야 할 것 같고 대면으로 하는 대화는 어떻게 더 이어나가야 할지 망설여진다. 훈에겐 말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우리가 탈 방역 안심 택시가 도착했다. 우주복을 입은 공무원은 마침내 훈을 벽 안에서 풀어준다. 우리는 당시 내가 거주하던 투룸짜리 자취집으로 이동하게 된다. 택시에서는 마스크를 끼고 있으면서도 두 손을 꼭 잡고 놓지 않는다. 까닭 없이 훈의 팔을 쓰다듬고 등을 매만져도 본다. 다시는 우리 떨어지지 않기를, 내 손으로 훈의 존재를 체감하며 집으로 향한다.     





한 시간 반 쯤 달렸을까. 택시가 익숙한 동네로 진입한다. 훈에게 말한다. 자기야 거의 다 왔어. 온전한 둘의 시간을 가지라는 듯 말이 없던 기사님이 슬며시 한 마디 건넨다. 남자친구예요? 어느 나라에서 왔어요? 나는 무엇이 자랑스럽기라도 한 듯 그에게 말한다. 아니요, 제 남편이에요. 뤼트키예에서 왔어요. 택시가 자취 집 주차장에 선다. 커다란 훈의 캐리어가 트렁크에서 내려지니 이제야 무사 귀국에 안심하게 된다. 기사님이 가고 우리는 3층 1호로 들어간다. 나 혼자 지낼 때와 달리 번쩐번쩍 깨끗한 거실이 우리를 반긴다. 그제야 우리는 뜨거운 포옹을 할 수 있다.     



신혼은 당시 내가 거주하던 제기동 자취집에서 시작되었다. 연애할 때도 훈이 두어번 와본 적 있던 그 집이다. 아무래도 첫 시작을 그곳에서 끊었다보니, 동대문구 제기동하면 서려 있는 기억이 많다. 주말이면 들리던 경동시장, 쇼핑하는 소소한 재미를 즐기던 홈플러스 동대문점, 놀란 눈으로 훈을 바라보던 제기동 터줏대감 할머니 할아버지들, 이따금 방문했던 고려대학교 맛집들. 비록 15평짜리 투룸에서 시작한 결혼 생활이지만 지금도 우리는 그곳에 대한 아련한 추억을 가지고 산다. 훈과 거의 매일 맥주 아니면 와인 한 잔하던 시간이 꽤나 오붓했던 모양이다. 사랑은 은하수 다방 문 앞에서 만나 홍차와 냉커피를 마시며 매일 똑같은 노래를 듣다가 온기도 한다.     



둘이 한 가족을 이루어 살게 된 후, 한동안 우리 집 가장은 나였다. 아침 알람이 울리면 억지 눈을 떠 자고 있던 훈의 이불을 목 끝까지 덮어주고 출근하는 날이 이어졌다. 퇴근 시간이면 한시라도 빨리 훈을 보고 싶어 뛰쳐오던 날의 연속이기도 했다. 회사생활은 무미했다. 재미도 없었고 의미를 잃은 지도 오래였다. 그럼에도 2인분치 밥값은 하기 위해 다녀야 했다. 물론 훈도 곧장 밥벌이 전선에 뛰어들 수도 있었지만, 그러라고 하지 않았다. 일단은 내가 돈을 벌 테니 당신은 한국어 공부를 하시오. 내가 판단하는 가장 빠른 시간에 가장 잘 서울에 적응하기 위한 시나리오요.     



혹 외벌이가 불만이었느냐고 묻는다면, 결코 그렇지는 않았다. 훈이 나를 위해 한국에 살겠다 결정해 준 것만으로 그는 그의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살 붙어 살 수 있게 된 현실만으로 감사하다고. 다시 말하지만 나는 우리가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의 남주와 여주쯤 된다고 확신했던 적이 있다. 그나마도 남북간 사랑은 아니라 다행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했고. 의지를 무력화시키는 데에는 우리가 당해내지 못할 커다란 힘이 존재했을 때, 가령 전쟁 호환마마 바이러스 그런 것들 때문에, 우리는 무너진다. 내 나라로 넘어와 준 사실에 무한한 책임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훈은 빠른 적응을 위해 언어부터 돌파하기로 했다. 한국어를 패치하기 시작했다. 서울 왕십리에 있던 H대학으로 유학 왔을 때, 분명 한국어 과정이 있기는 했지만 소홀했다고 한다. 한국에 더 거주할 의사가 없었으므로. 뽀로로와 대화할 수 있을 정도로만 공부했고 외국인 유학생으로서 그 정도면 A는 받을 수 있었다고 했다. 훈은 한국어를 어려워했다. 한국어 선생님이 있었으나 그에게 해결하지 못한 질문은 곧장 나에게로 넘어오곤 했다. 그때마다 나는 모국어의 실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훈이 물었다. 자기야, 피골이 상접하다 뜻이 뭐예요. 여기서는 왜 ~는데, 대신에 ~하지만을 써요, 의미가 뭐예요. 내가, 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가’는 ‘가’라서 ‘가’라고 배워왔던 것을 훈이 낱낱이 물어왔다. 벙찌는 날이 잦아졌다. 홍시 맛이 나서 홍시라고 한 것을 왜 홍시냐고 묻는 훈이 야속하기도 했다.     



홍시는 홍시인데. 이게 튀르키예 아빠가 말한 장애물이었던가.




(계속)





이 글은 네이버 연재 중인 글로, 원본에 해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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