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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은경 Feb 15. 2023

먼 발치에서

제7화

작년 10월 이태원에 사고가 있었다. 그것은 비참하고 끔찍해 참사로 불렸다. 할로윈 축제로 많은 인파가 모였고 피할 길 없던 청춘이 거기 영원히 머물러야 했다고 한다. 그들은 부모가 기다리는 집으로 갈 수 없었다. 대신 그 자리에 남아 못 다핀 한 송이 꽃이 되었다. 꽃을 생각하며 나도 몰래 고개를 떨굴 뿐이다.     



지난 2월 6일, 튀르키예 가지안텝 인근에서 지진이 발생했다. 일순간 5층짜리 건물은 형체를 잃고 무너졌고, 건물 앞을 지키던 차량은 콘크리트 덩어리에 깔려 내려앉았다. 미디어는 비교와 비유를 사용해 이 지진이 얼마나 거대하고 세찬 놈인지 앞다퉈 송출해왔다. 가령 이런 제목으로, ‘84년 만에 최악의 지진’, ‘원자폭탄 수십 개보다 강해’, ‘…’. 사망자 수를 알리는 속보엔 ‘달한다’라는 표현이 주로 사용되었다. 시시각각으로 수백에서 시작해 천, 이천, 삼천을 넘더니 조금 전 뉴스엔 칠 천에 달했다. 가늠하기도 힘든 없는 피해다. 그곳의 처참함이 한국 전역에 퍼졌다. 어제 하루는 튀르키예에 있는 시댁 식구를 걱정하는 주변의 연락으로, 답장으로 손과 입이 마를 새 없었다.     



이태원 참사가 있던 그 밤, 우리 부부는 잠 중에 있었다. 비록 전 주에 튀르키예식 빵 사먹으러 이태원에 들르기는 했지만 그날은 강서구 우리집, 오롯이 둘이었고 거나하게 들이켠 맥주에 잠에 취한 터였다.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평온한 두 사람이 되어 코를 골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8시가 되어 확인한 연락에 단숨에 술이 깼을 뿐이다.     



「너희 괜찮은 거니. 뉴스에 서울에서 큰 사고가 났다더구나.

이게 무슨 일이라니…. 이 메시지 확인하거든 연락 주거라.」     



튀르키예 아빠가 보내온 메시지였다. 우리는 그때로 부스스 떠지지 않는 눈으로 뉴스부터 확인하게 된다. 이미 참사가 일어난 뒤였다. 허망함과 아득함이 저 멀리부터 빠르게 밀려왔다. 그러다 불쑥, 튀르키예에 있는 부모 생각이 더 빠르게 치고 온다. 밤새 걱정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부재중 전화 그리고 남겨진 메시지엔 시댁 식구들 감정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안타까움, 걱정, 불안, 가능성, 희망, 안도, 그러다 다시 초조. 걱정에서 시작한 상상이 최고조에 달할 때 다양한 가능성에서 비롯한 감정은 나도 잘 알고 있다. 마냥 연락 오기만 기다려야 했던 시부모에게 미안할 수밖에. 남편은 급히 우리 소식을 알렸다. 잘 있다고, 연락이 늦어 미안하다고.     





마찬가지로 튀르키예 지진 소식을 접한 것도 또 다른 부모에게서였다. 이번엔 내 부모였다. 다음은 엄마가 보낸 메시지다. ‘튀르키예에 지진이 크게 났다던데 얼른 뉴스 봐봐.’ 시댁은 튀르키예 서남쪽 위치한 안탈리아에 있다. 지진도 남부에서 일어났다니 엄마가 서둘러 확인해 보라던 데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급히 포털 사이트에 접속해 뉴스를 확인했다. 엄마가 전한 말이 거기 속보로 쓰여있다. 튀르키예 남부에 규모 7.8의 괴수 같은 지진이 일어났다. 남편 훈에게 소식을 전했다. 남편은 진작 한국에 거주 중인 튀르키예인 단체톡방에서 확인한 터였다. 이미 튀르키예에 있는 아빠에게 연락을 취한 상태기도 했다.     



「우리는 괜찮아. 너희는 잘 지내고 있니.

그나저나 나라가 말이 아니구나…. 더 큰 피해가 없어야 할 텐데.」   



아빠에게 온 답장이다. 저녁에 다시 한 번 통화를 했다. 역시나 알아듣기 힘든 튀르키예어가 수화기 너머 둘 사이를 오갔다. 남편 옆에 딱 붙어 그의 표정을 살피는 일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대화 중 그가 쯧쯧하고 혀끝을 찰 때나 ‘알라알라(Allah Allah)’하고 어떤 감탄사 따위를 소리 낼 때, 그래도 일그러진 표정이 조금은 펴질 때, 나의 표정은 덩달아 찌그러지고 펴지고를 반복한다. 통화가 끝난 그제야 남편에게 “뭐래 뭐래, 뭐라셔?”하고 다급하게 묻는다. 가족들, 친척들 모두 무사하다는 것을 골자로 남편은 짧은 브리핑을 해주었다. 그러나 그의 표정이 좋지만은 않다. 남편은 내게 영향을 줄까 싶어 애써 표정을 감춰보지만 그 모습은 영 보기가 아프다. 고국에 일어난 재해에 참담하기라도 한 듯, 남편은 한동안 말이 없다. 먼발치에서 바라만 보는 게 가장 힘든 일임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안다. 남편의 침묵은 아마 그래서라는 것도 잘 알 수 있다.    


 

*

우리는 거리와 시차를 중간으로, 한국과 튀르키예에 각각 가족이 있다. 두 나라는 거리가 멀고 거리만큼 시간 차이가 생긴다. 정확히는 12시간 그리고 6시간. 비행기로 12시간을 가야 만날 수 있고 6시간이라는 시차로 연락이 어긋날 때가 존재한다. 한국이 오전 6시라면 튀르키예는 밤 12시라서이다. 그리고 이것은 때로 우리를 조여온다. 치솟는 불안을 누르고 눌러야 한다. 특히 뉴스거리가 생겼을 때, 미디어 송출이 서로의 답장보다 빠를 때, 뉴스로밖에 영문을 알아낼 길이 없을 때,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희망을 안고 별일 없을 것임을 주술처럼 되뇌일 뿐. 이는 먼 거리를 사이로 떨어져 살아야 하는 가족의 숙명일 지도 모른다. 이번 두 번의 경험을 통해 배운다.     



그래서 생긴 바람이라면 이것 외에는 더 없게 된다. 그저 무탈하기만을, 건강히 잘 지내기를. 더 바랄 것은 없어진다. 우리 당장 그곳에 가 당신을 살펴볼 수는 없으니 그저 마음이라도 보태는 수밖에. 서로의 안녕을 절실히 소원해 주는 사이가 되고 있다. 가족은 점점 더 절절해져만 간다. 먼 발치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음이 어쩌면 마음을 더 간절하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수능 대박기원 n천배를 올리던 엄마의 마음도 비슷하지 않았으려나. 그래서 바라는 것도 이것 뿐. “무사히 잘 지내고 계셔주세요.”     



*

시댁 식구들 괜찮으시냐고, 어제 메시지창을 도배해준 그들에게 차마 할 수 없던 말이 있다. 그것은 ‘다행히도.’ 다행히 우리 가족들은 무사해요, 라는 안부를 건넬 수 없었다. 대신 무사하고 안전하게 지내고 있다고 함께 걱정해 주어 고맙다고. 여기까지가 내가 전한 인사다.     



자연재해로 무고하게 돌아가신 그들을 떠올리면 다행과 불행을 가르는 지점은 있을 수 없는 것만 같다. 나의 가족이 무탈한 것은 우리로서는 안도할 일이지만 다행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같은 마음에서, 신을 믿는 건 아니다만 그래도 신이 있다면 그들에게 마지막 평안을 내려주시기를. 두 손 모아 기도라는 것을 해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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