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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은경 Mar 15. 2023

K-뷰티(그렇게 외국은 갈만한 곳이 된다)

제11화

FLIGHT KC911 ARR 21:35, 16DEC22     



장장 12시간을 글자 ‘뉘’처럼 앉아 버텼다. 반나절을 그러고 있느라 엉덩이는 납작해지고 고관절은 사라져 버린 듯한 기분. 그렇게 견디나니 마침내 이스탄불 공항이다. 이스탄불 고유의 냄새가 우리 부부를 반긴다. 게이트 밖을 나서니 포근한 공기가 온 몸을 스쳐 지나간다. 서울은 오늘 영하 13도라던데 이스탄불은 영상 14도래, 그래서 그런가봐. 다시 찾은 가을에 한국에서 입고 온 패딩 점퍼를 벗는다. 치렁치렁 손에 들린 점퍼가 하나도 불만스럽지 않다. 비에 홀딱 젖어도 실실 웃음만 새어나올 것 같다.     



‘아 시댁 가고 싶다’며 그토록 바라던 현재가 지금이 되었다. 그러나 잘 믿기지 않는 바람에 이게 꿈은 아닐까 꽃잎 한 장 한 장을 뜯듯 곱씹어 묻는다. 꿈, 아니 현실, 아니 꿈, 아니아니 현실. 그동안 남편 훈은 공항버스 기사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훈이 유창한 튀르키예어로 뭐라뭐라 이야기 하는데 그 내용을 대충 짐작만 할 뿐, 알아들을 수 없고 그래서 개입할 수 없다. 그저 뒤에서 조용히 듣고만 있는다. 남편의 나라에서만큼은 나는 어린아이가 되어 어른인 훈의 결정을 기다리는 신세가 된다. 그리고 어른이 어린이가 되는 경험은 아주 귀하고도 소중하다. 어른이라고 늘 어른행세가 즐거운 건 아니니까.     





튀르키예에 올 때마다 나를 기쁘게 하는 건 ‘어서와’라며 반겨주는 미소들이다. 그게 그렇게나 나를 녹인다. 어쩐지 여기서만큼은 보호 받으며 여행할 수 있을 것 같달까. 뒤이어 어디에서 왔냐는 질문, 한국에서 왔다는 내 대답에 따르는 반응들이 나를 으쓱하게 한다. ‘와, 한국? 좋은 나라지. 어서와. 환영해!’ 그제야 조금씩 내가 튀르키예에 있구나, 하는 현실감을 되찾으며 여기 현존하는 나를 발견한다. 당분간 나는 외국인이자 이방인, 한국에 나는 없지요. 그렇게 우리의 일정이 시작되었다.     



아무렴 남편의 나라이지만 외국이기도 한 까닭에 나는 이곳에 올 때마다 부득 탐구라는 걸 하게 된다. 요모조모를 살피고 궁금해 하다 판단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아직 깊숙이 알지 못하는 존재엔 뇌의 호기심이 가동하기 마련이다. 나는 튀르키예 면면을 살핀다. 그리고 한국에 와서는 전달자가 되어 면면을 공유한다. 궁금해 할 그들을 대신해 내가 보고 듣고 경험한 일부를 마치 전부인양 이야기 한다. 전부가 아님에도 전부인 것처럼. 그리고 그것은 나의 잘못이라기보다 여행이라는 시간적 한계로 일부만 보고 느낄 수 있음에, 허나 남은 건 전부이기 때문 아닐까 생각했다. 여행의 일부가 나라의 전부를 대변하기 쉽다.     



그리고 일부가 전부가 되는 현상이 ‘일반화’라고 한다면 일반화의 오류를 범할 확률도 높은 반면 일반화의 미화를 펼쳐 보일 수도 있다. 일부분으로 전부 또한 아름다울 거라 여기도록 함. 시댁에서 지내며 나는 내가 K-사절(단)이 된 게 아닐까 스스로 자부할 때가 한두 번 아니다. 우리는 가족이라는 수신자가 있는 여행을 왔고 시댁에 지내는 동안 나를 만난 모두는 한국인 나를 탐구할 것이었다. 이곳 사람들이 경험할 한국의 일부이자 전부가 될 것이었다. 덕분에 (의도와 달리)나라를 대표해 온 사절 아닌 사절로서 잘해야 한다는 무언의 무게가 생겼다.      



그러나 나라를 향한 일말의 책임감이 꼭 아름다울 미(美)를 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정직하다고 정 많고 따스한 사람이라고 아마 한국이라는 나라는 그러할 거라고, 그 정도였지 어쩌다 내가 미의 사절이 될 줄은 몰랐다.     





시댁에 온지 얼마 지나지 않아 동네 Abla(아블라, 튀르키예어로 누나나 언니를 칭한다. 이 글에선 ‘이모님’정도로 해석할 수 있겠다)들이 시댁에 모였다. 훈이 왔다는 반가움 그리고 한국 며느리가 왔다는 신기함, 이 두 가지쯤이 그들을 모이게 한 것이다. 꽃무늬가 그려진 히잡을 두르고 온 아블라, 입고 있던 옷의 색채감에 맞춰 카키톤의 히잡을 두른 아블라, 그냥 나처럼 치렁치렁 긴 머리를 하고 온 아블라, 그렇게 아블라s가 모였고 나를 향해 환하게 웃고 있었다. 따스한 눈길들, 일순간 그들 관심의 대상이 된 것이 제법 괜찮았다.     



여느 나라나 여성이라면 마땅히 가꾸고 싶은 미(美)가 있는 법. 튀르키예 사-오십대 아블라 사이에서도 K-화장품에 관한 관심은 끊이지 않았다. 가령 이모들에게 있어 BTS는 낯선 존재일지라도 이니스프리는 들어 본 상황, 라네즈는 로망이 된 브랜드. 대략 SNS를 통해 알게 된 듯 하고 이모들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며 확산된 듯 보였다. 그리고 K-화장품을 향한 이모들의 어떠한 동경 같은 것은 한국인인 나를 보며 확고한 믿음이 된 듯 했다. 누가 물었다.     



“은경, 네가 삼십대라니! 믿기지 않아! 피부 관리 어떻게 한 거야?”     



놀랍게도 튀르키예에 갈 때마다 나는 십여 년 전 ‘나’로 회귀하게 된다. 나보다 6살은 더 젊은 남편보다 6살은 더 어리게 보니, 이십대 초반으로 보는 셈이다. 이쯤 한 가지 고백을 하자면 작은 키와 동그스름한 얼굴을 한 동양인 치트키 덕에 다소 동안으로 보이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허나 누군가 부러워 할 만 한 피부를 가진 것은 아니고 주름이 적다고나 해야 할까. 하여간 이모의 설레발은 잠시나마 ‘그냥 튀르키예에 살까’ 하는 고민에 빠지게 했으며 기분이 좋았던 것도 사실. 나는 별거 아니라는 듯 다소 민망해 하면서도 그 순간을 즐겼다. 마치 미의 사절이 된 듯 했다. 한국인은 놀랍도록 어려 보여. 이 순간을 계기로 K-화장품 판매가 조금 더 늘지 모를 일이었다. 아마 나는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다. 무엇을 바르냐고 묻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한편 자신 있던 것은 인사 잘하기, 그리고 감사하다는 인사 잘하기였다. 만나는 지인들 마다 고맙다고 했던 것 같다. 어눌한 발음 그러나 한국식 정직한 발음으로 소리 냈다. “Tesekkurler(테셰뀔레르).” 튀르키예어로 고맙다는 인사다. 식당에 가 주문한 메뉴가 나오면 고맙습니다, 계산할 때도 고맙습니다, 튀르키예 엄마가 준비해준 식사에 고맙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운전해준 아빠에게 고맙습니다. 어려서부터 인사만 잘 해도 반은 먹고 들어간다고 했다. 나의 부모가 인사교육에 왜 그리 힘주어 가르쳤던지 알 수 있다. 어설픈 발음으로 곰맙슴미당 소리 내는 게 그리 예뻐 보였나보다. 고맙다는 인사가 그리 고마웠나보다. 시엄마 왈, 다들 은경을 좋아하고 칭찬한다고 했다고 했으니 말이다.     



엄. 나머지 특별하게 한 것은 없지만 이것만으로 충분히 나라에 보탬이 되었을 것이었다. 그것은 훈의 아내인 한국인 은경으로 기억할 것이 아니라 ‘한국인은~’이라고 시작하는 어떤 문장으로 창조될 것임을 경험으로 알고 있다. 한국에서 만난 외국인에게서 본 일부를 그 나라 전부로 대입했던 나처럼, 아블라s와 튀르키예인 사이 적어도 한국은 호감형 나라로 여겨지겠지.     



아무튼, 생에 잊고 있던 애국심은 외국만 나가면 생기는 모양. 애국심 고취를 위해서라도 더 눌러 지내야 할까보다 싶은 마음.


(이 글은 작년 12월 시댁 튀르키예에 가 있는 동안 쓴 글입니다)





이 글은 네이버 연재 중인 글로, 원본에 해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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