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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은경 Mar 22. 2023

로컬 남편

제12화

지난 12월 19일을 기점으로 우리 부부는 훈의 나라 튀르키예, 그 중에도 안탈리아에 와 지내고 있다. 하필 왜 안탈리아에 지내고 있느냐 하면 이곳은 나의 시댁이자 훈의 가족이 사는 곳이기도 하고, 이번 튀르키예행 만큼은 한참 가족이 그리웠을 훈을 위해 시댁에 쭉 머물자고 하기도 했고, 전에 말했던 것처럼 ‘아 시댁 가고 싶다’는 나의 바람이기도 했으며, 아무쪼록 서울살이의 고단함을 엄마아빠 보살핌 아래 풀고자 했으므로. 이것이 안탈리아에 머물고 있는 이유이다.     



여기 지내며 틈틈이 그러나 빡세게 여러 유적지들을 돌고 있다. 구름 한 점 보이지 않는 안탈리아 날씨는 쾌청하면서도 온화할 뿐 아니라 끝내주는 지중해 뷰 때문인지, 수천 년 전에도 거주지로 대환영이지 않았나 싶다. 예로부터 살기 좋은 땅엔 인간이 몰려 살았던 법. 고대인들의 거주 흔적을 안탈리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보통 기원전, 돌덩어리를 사용해 지어진 도시들이었다. 지난주부터 뮤지엄 패스를 구매해 페르게, 아스펜도스, 파셀리스, 시데, 테르모소스, 뎀레 고대 도시들을 돌았다. 세월의 흔적 따라 일부 무너져 형태를 잃었어도 장엄함 따위는 감각할 수 있었는데, 이 많은 곳들을 다녀왔음에도 반전은 아직 못 가본 몇 군데가 더 남았다는 것. 으아악. 많아도 너무 많아. 매일 밤, ‘오늘도 빡셌어…’ 하고 앓다가 곯아떨어지는 게 이곳 일상이 되었다.     




그러니까 그래서, 몸적으로 굉장히 고된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 보여주고 소개시켜주고 싶은 게 어찌나 많은지 남편 훈은 여기저기 나를 끌고 다닌다. 고대 유적지에 갈 때도 그랬고 고대 유적지에 가지 않는 날도 그랬고, 내가 책에서 우연한 만남을 발견했을 때 그 흥분감에 훈의 팔을 끌어당겨 책 속으로 데려갈 때처럼, 튀르키예 이모저모를 소개한다. 사랑하는 이와 경험을 공유한다는 것은 언제나 기쁨인 것이다. 내 이를 모르는 바 아니라 고된 일정이지만 그저 웃으며 따를 뿐. 그의 경험은 곧 나의 경험이 되고 우리의 공감은 넓고 깊어만 간다.     



그렇게 오른손에 꽉 쥐어진 남편 손을 잡고 쫄랑쫄랑 따라가다 보면 정녕 이것이 현지인과 현지를 여행하는 이득인가, 이것이 바로 개이득인가 싶을 순간을 만난다. 남편이 로컬(*흔히들 ‘현지(인)’라고 부르는 그 영어)이라 사무치게 고마운 날들. 이제 와 고백하건데 실은 오늘 하려던 이야기가 고대 유적에 관한 건 아니었고 바로 이 로컬 남편에게서 누릴 수 있는 개이득에 관한 것이었다. 서두가 다소 길어졌지만 정녕 하고 싶던 말은 #로컬#남편#개이득 이었다.     



그렇다면 남편이 로컬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우선 포털에 떠도는, 한국인들 사이 회자되고 회자되는, 우리네 입맛에 맞게 추천된 그 유명한 관광지 말고, 숨겨진 맛좋고 멋진 곳에 갈 수 있다. 현지인만 아는 숨겨진 명소라고나 하겠다. 해외여행이 좋은 이유가 무어냐 묻는다면 ‘한국’이라는 이 나라에 한국인인 내가 지켜야할 의무(와 그에 따른 마땅한 권리로부터)로부터 해방이라 말할 것이다. 의무는 종종 우리를 묶어두고 옴짝달싹 하지 못하게 한다. 의무가 현존하는 국내여행보다 해외여행을 선호하게 된 이유라 말하겠다. 그러므로 외국에 갈 때면 한국 의무를 상기시키는 모든 것으로부터 멀어지려 한다. 여기 와서까지 한국음식은 굳이, 한국어도 굳이, 한국인도 굳이. 그래서겠지. 외국여행 할 때면 이따금 투정하던 바로 이 대목. 꼭 가봐야 할 커피숍이라 하여 들리니 현지인은 커녕 자리 대부분을 차지하던 한국인 집단, 거기 섞여 있는 나. 쉬는 게 쉬는 게 아닌 것처럼, 모르는데 아는 사이도 아닌 것처럼, 인사를 해야 할 것도, 귓가로 또렷이 들려오는 내 나라말을 안 들은 척 할 수도, 고것 참 난감하도다. 이런 어설픈 불편함이 싫었다. 그러나 튀르키예에 오고는 다르다.    




 

튀르키예 로컬인 훈은 로컬만 가는 곳에 나를 데리고 간다. 며느리도 모르고 외국인도 모르고 현지인들만 알고 있다는 그 곳에 가자고 한다. 진짜는 숨겨져 있고 로컬인 훈은 진짜를 안다. 특히 여행지 뿐 아니라 맛집 수혜를 크게 보는 중이다. 한국인에게 ‘여행지 맛집’ 소스의 근원은 어디일까. 주로 미리 가본, 미리 가본 사람 보다 미리 가본, 한국인 아무개가 블로그에 올린 사진 그리고 평을 살피다 차곡차곡 엑셀 파일에 모으고 정리해 가는 곳이 대부분이겠다. 그러나 로컬 남편을 둔 덕에 상황이 좀 다르다. 훈이 데려간 맛집 열의 아홉은 현지인으로 가득하다. 소박한 동네 식당 같은 곳이었는데 모두가 그 집의 시그니쳐 메뉴를 먹고 있고 회전이 빨라 앉자마자 음식이 나온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렇다고 한국인 입맛에 맞지 않을 소냐, NoNo. 세계 어딜가나 맛있는 건 맛있는 거다. 싱싱한 재료 자체에서 풍기는 풍미와 나노 단위까지 맛을 고민한 듯한 감칠맛, 너무 맛있어서 엄지손가락이 절로 선다. 따봉b. ‘아 잘 먹었다’ 하는 감탄과 함께 그릇을 말끔히 비우고 나오면 훈이 계산을 하러 간다. 얼마냐는 물음에 세상에나, 여행지에서 지불했던 가격 보다 30~50%정도 저렴하다니. 이래서 현지 맛집은 다르구나 할 뿐이다.     



무엇보다 안 통하는 대화가 없다. 현지를 돌 때면 남편 훈은 나보다 반걸음 앞서곤 한다. 길을 묻거나, 가격을 묻고 흥정을 할 때, 그의 왼손은 반쯤 뒤로 뻗어 있고 나의 오른손은 반쯤 앞으로 뻗어나가 있는 건 그래서다. 로컬만 다니는 곳을 주로 다니다 보면 불가피 (만국 공통어쯤에 해당하는)영어가 통하지 않을 때가 잦다. 그때마다 훈의 유창한 튀르키예어가 빛을 발했는데 가만히 듣던 나는 훈이 대화를 마칠 무렵 이 한 마디만 하면 된다.     



“뭐라셔?”     



그럼 훈이 뭐라셨는지 영어나 한국어로 번역해 준다. 나는 좋다, 거나 별로, 라거나 알겠다, 정도를 말하면 그뿐이다. 물론 외국에서 온 나라고 바가지 씌우는 일도 결코 없다. 떡 하니 로컬 남편이 나를 지키고 있고 그의 보호 아래 현지를 여행해서다. 가끔 묻기는 한다. 저 동양인은 누구냐고. 그럼 남편은 내 아내이고 남한(*여느 외국에서 경험했듯, 튀르키예인 또한 남한과 북한으로 분리하여 한국을 떠올린다. ‘한국’이라고 하면 남쪽에서 왔느냐 북쪽에서 왔느냐 묻는 것도 한 맥락일 것이다)사람이라고 한다. 아하 그렇구나, 하더니 튀르키예에 온 걸 환영한다며 활짝 웃으며 나를 맞아준다. 따스한 미소에 사르르 녹는다.     



로컬 남편 덕에 한낱 여행이었다면 볼 수 없던 튀르키예 현지 면면을 들여다본다. 여행지가 뿜는 화려함은 보기 힘든 대신 투박하지만 생생한 튀르키예 사람들의 삶과 일상에 닿는다. 어쩌면 나는 여행이 아니라 현지행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거기 없지만 여기에 있고 여기에 있어도 볼 수 없었을, 그것을 나의 일상인양 몸으로 스치며 매일을 난다. 생(生)이 발동하는 또 하나의 현장을 보는 것처럼. 그때마다 한국에 태어나 고맙기도 밉기도 복잡다단한 감정이 얽히고설키지만 까닭 없이 그저 남편 훈에게 고마운 것. 생(生)은 여기에도 있다.


(이 글은 작년 12월 튀르키예 안탈리아에서 쓴 글입니다).






위는 네이버 연재 중인 글로, 원본에 해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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