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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은경 Mar 29. 2023

국제부부의 언어

제13화

언어 수준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관념과 같아 형체는 없으나 언어로서 분명히 존재하는 생각을, 음성으로 ‘말 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내가 언어하는 수준이 나의 정신의 수준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 실은 무수히 잠재하는 생각, 생각은 보다 구체적으로 견해, 이유, 제안, 사례로 자리하건만 그저 말할 수 없음에 나는 생각 없는 사람이 되는 건가. 부족한 구사 능력만큼 줄어드는 것인가.     



그렇게 한국어로만 그려지는 이 무수한 언어의 집체(생각)는 머리에서 입을 거쳐 나의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으니. 한국어로 존재하다 튀르키예어로 변환되지 못한 나의 생각은 소멸할 뿐. 한국어로는 꽤나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생각을 언어로서 말로 구현해 낼 수 있건만, 시댁인 튀르키예에 와 내가 하는 언어는 고작 이것.     

안녕하세요, 잘 지냈어요, 보고 싶었어요, 요즘 어때요, 좋아요 너무 좋아요, 아니요, 괜찮아요, 잘 먹었습니다, 고마워요, 배고파요 배불러요, 문 열어요 문 닫아요, 사랑해요, 우리 또 만나요.     



이것은 완성형 문장으로, 어설픈 발음이지만 튀르키예 사람 모두가 알아들을 것이겠다. 허나 문장이 아닌 몇몇 단어로만 말할 때도 있는데, 가령 ‘빵’이라고 하면 빵을 먹고 싶다 정도로 알아듣거나 ‘버스’라고 말하면 ‘버스를 타고 갈 거다’라고 상대가 알아서 이해하길 바라며 뱉는 무성의한 대화도 오간다. 그러나 이마저 안 될 때가 있으니, 그럴 때면 두 손을 공손히 모아 중요 부위에 가져다 대며 소변 마려울 때 하는 시늉을 보인다던가와 같은 바디랭귀지를 사용할 뿐. 이 어디 한국나이 서른넷인 처자가 하는 언어겠는가, 동네 꼬맹이에 불과하지. 튀르키예어 하는 나의 언어 수준은 유치부 어린이를 닮았고, 그렇게 나는 시댁이 있는 튀르키예만 오면 어려진다. Welcome to 회춘! 시간을 거슬러 받았다.     



나나 너나



언어가 나이를 대변한다면 이곳에서 나는 5살쯤 아닐까 추정한다. 음성으로 변환해 말로 뱉어진 생각은 고작 5살배기 어린 아이에 불과하고 아이는 그런대로 튀르키예에 잘 적응 중이다. 어려지고 싶은 만큼 임의로 나이를 줄인 것은 아니다. 5살로 가늠한 것은 그저 6살인 시누와 얼추 사용하는 단어나 문장 구사력이 비슷해서다. 그러나 6살일 수 없는 건 시누보다 튀르키예어에 미숙하기 때문이다.     



한편 ‘꼬마’ ‘애기 같은’ 시누는 나를 철저히 ‘새언니’라 부른다. 결코 시누 노릇은 없고 애 짓은 잘 하면서 부르기는 무조건 ‘새언니’다. 시누는 새언니가 언어에 미숙하다는 것을 잘 알지만 아직 애 이므로, 다소 일방적으로 행동할 때가 잦다. 시누는 튀르키예어를 사용해 일방적으로 말을 건네 온다. 수신자인 내 언어 수준이 고작 5살에 불과하기에 일방적일 수밖에 없는데, 저 혼자 나를 향해 솰라솰라솰라 하는 순간 벙 찌게 된다. 어안이 벙벙해 하는 나를 본 시누는 아차 한다. 그러다 보면 무수히 반복된 순간이 이번에도 펼쳐진다. 원어민처럼 솰라솰라대다 끊어 다시 말하기, 이해했는지 확인하기.     



“여기에, 핸드폰을, 가지고, 오는 거야. 알겠지?”     



시누는 내 모자란 언어를 몹시 잘 이해하고 있다. 우리 사이에 대화는 주로 이런 식으로 이루어진다. 의미마다 또박또박 끊어 말하곤 확인 작업을 거친다(그래봐야 맥락으로 때려 맞추는 수준이지만). 이 어딘가 낯이 익었던 건 아이가 부모에게 학습 받을 때의 모습과 닮아서였다. 그렇다. 시누는 나를 가르치곤 한다. 가르치는 시누와 가르침 받는 나를 옆에서 보고 있노라면 시댁 식구 모두는 빵, 하고 웃음이 터진다. 상황이 묘하긴 한가보다 하고 우리 둘도 따라 웃는다.     



겉모습은 너무나 장성한, 주름 낀, 볼 살은 쪽 빠진 34살 어른이 구사하는 언어 수준이 고작 5살배기였을 때 오는 이질감의 결과는 바로 귀여움이다. 시댁이 있는 튀르키예에 와 귀엽다는 인사를 어찌나 많이 건네받았는지 모른다. 영어의 ‘Sweat’처럼 이곳도 귀엽고 사랑스러운 사람에게 달콤하다는 표현을 쓰던데 나더러 얼마나 달다고 했는지 카카오 함량으로 다 비교할 수 없다. 이유 대부분은 언어였으리라 믿고 있다. 한국어 하는 남편 훈을 볼 때마다 느낀 부분이고 그의 한국어 실력이 늘지 않기를 바라던 것도 그 때문이었으니까. 외국인이 자국어를 유려하게 해낸다는 것 또한 경이롭지만 어설프게나마 몇 마디 하려는 시도 자체는 갸륵한 귀여움을 낳는다. 이제 막 두 발로 걷기 시작한 아이를 보는 듯 하달까.     



멋진여자



그렇게 5살로서 시댁이 있는 튀르키예 안탈리아에 지내고 있다. 튀르키예어로 미처 번역되어지지 못한 생각은 소멸되어 구사할 수 있는 5살의 언어만 하며 지낸다. 말에서 보여지고 느껴지는 나는 굉장히 어리고 달고 귀여워 진다. 이따금 가족들 웃음 소재가 되고 종종 달달한 사람 취급을 받는 귀여운 아이가 된 나(34/서울).



어린 취급에 질색할 때가 있었는데 요즘은 어린 대접이 얼마나 귀한지 몰라. 지갑에 주민등록증 품은 삶을 동경했었다. 돈을 벌고 돈을 쓰고 술을 마시고 밤늦도록 놀고, 이 모든 행동에 부모 허락은 불필요할 거라던 독립된 개체로 홀로 서기를 바란 날이 스무 해였다. 비로소 어른이 되고 부모가 대신 지었던 내 행동의 책임이 고스란히 내가 옮겨 받을 때, 인생의 무게를 알았다. 쪼르르 엄마에게 달려가 ‘해줘’ 한 마디면 이루어지던 모두가 사라지고 스스로 얻어내야 했고, 엄마 등 뒤에 숨으면 그만이었던 두려움과 정면으로 마주해야 했다. 내키지 않은 일을 하며 돈을 벌어 돈을 쓸 수는 있었지만 고단함을 달래려 술을 마시게 되었고 부모 허락은 불필요해졌지만 대신 해결해 주었으면 하는 일이 늘었다. 한참 뛰어놀다 배고파 집에 들어온 나를 보고 ‘좋을 때’ 라며 쓴맛 다시던 그 어른이 흘린 말을 이제서 이해한다. 어른임에 힘에 부치던 그가 어린 나를 부러워했던 것이다. 어른인 내가 시누를 보며 흘리는 말이 된 것처럼.     



그러나 시댁만 오면 나는 한없이 어려지고 어려지다 다시 어린아이로 돌아가 보호자가 생긴 기분이 든다. 부모 보살핌 아래 즐거운 어린아이가 된다. 남편 나라의 언어를 배울 계획이 없느냐 묻는 누군가에게 그다지요, 하고 답했던 건 여기서라도 어리고 싶은 마음 때문. 시댁 식구 모두 튀르키예 사람이지만 여기 언어를 배우고 싶지 않은 커다란 이유. 언어가 나이를 대변한다면 이곳에서라도 한없이 어려져야지. 잠시 어른이기를 멈춰가야지.



(이 글은 작년 12월 튀르키예 안탈리아에서 쓴 글입니다).






위는 네이버 연재 중인 글로, 원본에 해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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