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손은경 May 03. 2023

외국인 배우자와 실제 대화하는 방식

제18화

"베이비, 그거 어디에 있어요?”     



훈이 집안에서 무언가를 찾고 있다. 안방과 작은방, 거실을 휘저으며 서랍이란 서랍은 다 열어본다. 그러나 훈이 찾는 중인 그것은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서랍을 닫을 땐 풀리지 않은 수학 문제를 만난 사람처럼 ‘흠’하고 콧바람을 뱉는다. 그러다 훈 혼자 힘으론 안 되겠던지 아내 은경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여기는 한국, 튀르키예에서 온 그는 종종 한국인 은경은 한국 전부를 알 거라는 전제하는 눈치다. 그가 모르는 것을, 한국에 거주 중인 한국인 은경은 알 것만 같다. 그거 어디에 있냐고 물으면 은경은 척 하고 알려줄 것만 같다. 어린아이가 제 엄마에게 죄다 묻는 꼴과 비슷하다.     



“?_? 뭐요? 뭐 말하는 거예요?”

“그거 있짜나요. 이렇게 이렇게 돌리는 거.”

“?_? 그게 뭐예요? 더 자세히 설명해 주세요.”

“그거 있짜나요. curtain에 하는 거. You know it because I showed you yesterday.”

“Can you speak it in english? I can’t understand.”

“아 어….”     



훈은 그것을 무어라 말하는지 영어로도 한국어로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렇기에 몸으로 애써 표현하기 시작한다. 오른손 엄지와 검지로 작은 하트 모양을 만든다. 맞닿은 두 손가락을 비빈다. 이렇게 이렇게 비빈 것처럼 생겼단다. 하지만 그런들 뭐하나, 여기는 고요 속에 외침과 같은 상황. 진행자 허참만 없을 뿐, 훈은 제 한 몸을 활용해 그것을 표현하고 은경은 그런 훈을 골똘히 살피는 일에 전념한다.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은경을 멍하니 쳐다도 본다. 어디서 분명 봤는데…. 지금은 은경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훈은 지금 필요한 그것이 지금 번쩍하고 떠오르지 않아 답답해한다. 그래서 “그거 있짜나요”만 이짜나요무새처럼 반복해 말한다. 답답한 자와 점점 답답해져 가는 자, 둘은 그것을 향한 답을 찾고 있다. 그런 게 있는데, 머릿속은 온통 그것으로 가득한데, 이미지로만 존재할 뿐, 도대체 그 명칭이 기억나지 않는다. 있긴 있다는데 뭐가 있다는 건지 알 수 없는 은경도 답답함에 가슴을 치긴 마찬가지다.     



“기억나요? edge가 이렇게 이렇게 생긴 거.”     



달리 표현할 방법이 떠올랐던 걸까. 앎이 생겼다는 듯 훈의 눈동자가 동그래지더니 갑자기 두 손으로 뾰족한 산 모양을 만들어 낸다. 산처럼 끝이 날카롭다는 뜻이었다. 그것이 ‘산’ 일리는 없다. 몇 번 반복해 산 모양을 만들어 내더니 그제야 은경이 소리친다.     



“아 그거!”  


   

은경은 진짜 알게 된 걸까. 소파에 앉아 있던 은경은 성큼성큼 안방으로 들어간다. 30초 뒤 홀가분한 미소를 한 채 웅장한 모습으로 훈에게로 다가간다.     



“이거 말하는 거죠?”

“네! 이거 맞아요! 이거 한국말로 뭐예요?”

“나사.”

“아 맞다맞다. 나사. N, A, S, A, right?”     



둘이 그토록 찾아 헤맸던 그것은 다름 아닌 나사였다. 훈이 엄지와 검지로 두 손가락을 비빈 것은 나사 선을 의미했고 두 손으로 산 모양을 만든 것은 나사 끝 부분의 뾰족함을 표현했다. 행위예술과 같았다.     





*

아시겠지만 훈과 나는 한국과 튀르키예를 잇는 국제부부다. 그렇다 보니 각자의 모국어를 소통어로 할 수 없고, 우리 부부의 경우는 한튀영. 즉, 한국어에 튀르키예어 발라 영어 적당히 버무려 대화한다. 최근 소식으로 업데이트 하자면 훈의 한국어가 늘고 있는 추세이므로 한국어로 소통하는 비율이 월등히 높아지긴 했다. 그런들, 외국인 배우자인 훈에게 한국어는 여전히 낯선 자와 같고 우리 대화는 종종 고요 속의 외침이 되기도 한다. 나라도 튀르키예어를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다면 좋았으련만, 의지가 부족한 아내를 용서해 주시오 남편.     


이번 ‘나사 사건’도 언어 다름에서 온 대화미쓰(miss)였다. 물론 한국인과 한국어로 대화할 적에도 소통에 변비가 생기곤 한다.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 애먹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남편 훈은 보통 모국어인 튀르키예어로는 알겠는데 한국어나 영어가 떠오르지 않을 때가 있는 듯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훈을 이해하려 애를 쓰고 훈은 무어라도 설명하려 기를 쓴다. 대화에 기스가 생겼지만 그럼에도 다 잘, 해결하는 방법은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결하느냐. 처음 훈은 가능한 한국어로 설명하려 한다. 단어는 기억나지 않아도 단어 주변부는 한국어로 설명할 수 있다. 아까처럼 훈은 한국어로 계속해 힌트를 준다. 그러며 “그거 있짜나요”를 반복해 말한다. 그와 동시에 행위예술, 즉 온몸으로 단어를 표현해낸다. 손가락 비비는 일, 두 손으로 산을 만드는 일, 손으로 구멍을 그리는 일, 크기를 가늠할 수 있도록 두 팔 벌리는 일 모두 표현의 일련이다. 그러나 여기서 해결할 수 없는 소통은 번역기에게 넘긴다.     





마지막엔 번역기를 돌린다. 튀르키예어에서 영어로, 영어에서 한국어로 번역한다. 중간에 영어를 끼는 건 다 계획에 있어서다. 한국어와 튀르키예어 사이 영어를 매개로 둘 때 가장 오역이 적다. 고로 번거로움도 감내한다. 그러다 보면 마침내 통하게 된다. 그때 만난 이심전심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통쾌하다. 막힘이 있었기에 해소가 후련할 수 있다.     



때로 국제결혼 했다는 내게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건넨다. 언어가 안 통해서 어떻게 사느냐고. 답답하지 않느냐고. 그때마다 하는 대답.     



“다 방법이 있어요.”     



언어가 벽을 만들진 않는다. 마음의 벽이 언어의 벽을 창조할 뿐(그러니 국제결혼을 꿈꾸는 이들이여 언어는 장벽이 아닙니다. 파이팅). 어디에나 방법은 있고 그렇기에 장벽은 결코 장애물 같은 벽이 될 수 없다. 그것이 국제결혼과 언어 간 관계일 것이다.     




*

참참, 훈은 요즘 다나카 영상 즐겨보는 나 때문에 발음 하나를 제대로 망쳐간다. 참고로 훈은 ‘꽃’과 ‘꼬추’라는 단어 모두를 알고 있다. 다나카가 꼬ㅊ가루를 날릴 때 그도 나와 함께 웃고 있다.    


 

“베이비, 꼬ㅊ는 언제 펴요?”

“엥? 뭐라고?”

“한국에 꼬ㅊ는 언제 피냐구요.”

“꼬ㅊ? 파하하(파안대소). 일부러 발음 그렇게 한 거 아니에요? 꼬츠 아니고 꽃! 꽃이라고 해야죠! 4월쯤 필 거예요.”

“크크큭. 아니요. 꼬ㅊ예요. 한국에 꼬ㅊ 언제 펴요?”     



그리고 나는 아무 말 할 수 없었다. 그 꼬츠가 언제 필지는 다나카만이 알 뿐.








위는 네이버 연재 중인 글로, 원본에 해당합니다.

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aver?volumeNo=34947032&memberNo=38753951&navigationType=push





매거진의 이전글 가슴에 털 난 외국인에 관하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