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화
눈 뜨니 웬 콩순이 인형이 눈을 감고 있다. 고개를 뒤로 젖혔다가 바로 할 때마다 번뜩하고 떴다가 새근하고 감는 그 눈이다. 짙은 쌍커풀, 촘촘히 박힌 속눈썹에 컬이 졌다. 어찌나 풍성하고 잘 올라갔는지 몇 올 뽑아다 내 눈에 심고 싶어진다. 심지어 동양인은 성형으로 만들 수 없을 것도 보인다. 이 코는 매우 높고 날카롭게 잘 빚어졌다. 헤이즐넛처럼 조그만 내 코완 이질적인 것인데, 둘 다 자연산인거슬 어쩜 이렇게 다른지 모른다.
자고 있는 외국 콩순이를 뒤로하고 안방을 빠져나와 작업을 하고 있으면, 곧 그가 일어난다. 번쩍하고 여태 봐온 생명체와는 좀 다른 모습을 한 그가 성큼 내 눈 앞에 서 있다. 긴 핑크펜더 같다. 훈은 주로 아침에 샤워를 한다. 루틴으로 말할 것 같으면 7시 30분에 일어나 아침 인사를 한 뒤, 밤새 쌓인 노폐물을 배출하고는 화장실 밖으로 팬티 한 장 던지는 즉시 촤르르 하는 물소리를 내보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그러다 뚝 물소리가 끊길 때가 있는데 그 맘쯤 면도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훈은 반나절 만에도 수염이 얼굴을 메우는 유전자를 가진 튀르키예인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제 밤까지만 해도 어린 피부 결 같던 그의 피부를, 반나절만에 김 하나를 턱 밑이며 볼 아래 붙여둔 것처럼 보이게도 하지. 만져본 자로서 촉감을 말하자면 두껍고 뿌리 깊은 그것이 까끌까끌 때밀이 같다. 보이는 종류의 섹시함과는 좀 다른 동네목욕탕 느낌.
낮에는 바깥 활동을 하는데, 외부와 접촉할 때면 훈이 한국인에게 종종 받는 질문이 있다. 한국말 할 줄 아냐는 것과 어느 나라에서 온 사람이냐는 것, 그 다음으로 이탈리아 사람 아니냐는, 답을 정한 채 묻는 그것이다. 그 질문은 주로 어머니들 입에서 새어나오곤 한다.
“이탈리아 사람 아니여? 어쩜 이렇게 잘생겼댜?”
하고는 훈을 빠아안히 쳐다본다. 어머니들은 유럽 감성을 좋아하는 모양. 굵직하고 날카롭고 또렷한 얼굴을 선호하는가봄. 훈의 얼굴엔 선 굵은 단정함이 있고, 그것은 중동 사람에게서 느낄 수 있는 어떤 선과 색은 아니기에 아마 그럴 거라는 추측을 한다. 사실 튀르키예에 가면 누가 튀르키예 사람인지 유럽 사람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대부분 유럽스럽게 생겼기는 하다.
그러나 훈은 분명하게 하고 싶은가 보다. 질문에 대답한다.
“저는 이탈리아 사람도 아니고 유럽 사람도 아니고 미들이스트(middle east)에서 온 튀르키예 사람이에요.”
튀르키예가 동유럽 아니냐고 되묻지만 엄격히 따지면 중동이라며 정체성을 제 자리로 가져다 놓는다. 그때 어머니들은 다소 놀라 보이지만 어쨌거나 참 좋아해준다. 그러다 옆에 있던 나를 힐끗 보고는 ‘너는 전형적인 한국인의 얼굴을 가졌구나’ 하는, 결코 그들이 말하지 않은 그 마음의 이야기를 듣곤 하는데 어쩌면 겉으로 본 우리는 엄청난 언발란스. 버터에 갓김치가 얹어 다니는 모습이려나. 그래서 드는 나의 생각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우리 외모가 다름을 새삼 알게 될 때마다, 그러니까 하루에도 몇 번은 이질적 외모에 대하여 생각하게 된다. 이질적이라는 상태란 무얼까? 그것도 가장 자극이 심하다는 시각을 통해 느껴진 이질감. N과 S극처럼 양 극단에 있음으로 서로를 끌어당기는 상태일까, 혹은 동질적이지 않으므로 하나로 합쳐질 수 없는 어떤 포인트를 가지고 나와 맞는 사람 취급을 하게 되는 요인이 되는 걸까.
내 경우는 전자였던 듯하다. 내게 없는 유전자를 그에게서 보충하고픈 ‘생물학적 욕구’에서 비롯했는지 모르나 버터 훈은 사귀기 전부터 멋져 보였다(반면 은주언니는 훈의 사진을 보고 ‘느끼하다’고 했다). 짙은 쌍커플, 깊게 패인 눈과 긴 속눈썹, 섹시하게 잘 빠진 코. 새끼손가락으로 가려질 작은 눈, 뼈가 없다고 해도 믿어질 만큼 낮은 콧대인 나완 달랐다. 허나 훈은 인정 못 하는 눈치다. 사귈까 말까 고민했는데 실은 그날 너무 멋있어 보여서 사귄 거라고 내가 말해도 믿지 않는다. 그리고 말한다. 터키에 가면 나는 아주 평범하게 생긴 축에 속하지.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눈이 크고 코가 높으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거 같아. 성형도 눈이 커지고 코가 높아지려고 하잖아. 나뿐만 아니라 외국인 친구들이 이태원 걸어 다니기만 해도 많은 여성에게 관심받는 걸 봤어. 내가 잘생겨서가 아니라 외국인이라서 그런 거 같아. 그리고 하는 말이 ‘그래서 내가 잘생겼다는 건 거짓말이야’라는 거였다.
그게 어때서.
라고 말하며 그의 가슴에 난 털을 긁적여 주는데 훈이 물었다. 그럼 내 몸에 털이 있는 게 좋아 없는 게 좋아요? 한국사람은 몸에 털이 많이 없잖아요. 한국 남자들은 면도가 너무 편할 거예요. 아니아니, 털이 없었으면 더 좋겠어 아니면 있어도 괜찮아? 맥락 없이 종종 묻곤 한다. 이질감에서 오는 거부반응을 염두에 둔 것이겠다.
솔직히 까놓고 말하면, 처음 훈의 알몸을 보고 놀라기는 했다. 가장 놀라웠던 건 참새처럼 가슴팍에 난 털 때문이 아니라 분포 때문이었다. 어깨에 털이 자라는 사람은 난생 처음 보았다. 이것은 마치 시멘트 바닥을 뚫고 민들레가 자라는 듯한 거였다. 인체의 신비 뭐 그런 거. 물론 잠깐 놀라기는 했으나 그게 전부이기도 했다. 닭털을 다 뽑은 듯 뽀얀 한국 몸에 익숙했지만 어디까지나 털 한 올이 훈이었고 다행히 나는 금세 적응할 수 있었다.
(그러나 포메라니안과 치와와가 미치는 털의 영향이 다른 것처럼, 털도 풍성한 정도에 따라 좀 고오오생이 따르는 건 사실이다. 개를 키우는 기분이다. 흩날리는 털 때문에 시름하는 견주의 고통을 십분 이해한다. 그가 지나간 자리는 언제나 흔적이 남는다. 라면 면을 3cm씩 잘라놓은 듯한 그것이 바닥에 즐비하고, 모르는 사이 옷에 묻어 나의 청결을 망친다. 만약 훈이 개라면 아마 포메라니안이나 털이 꽉 찬 검정 푸들일 것이다).
어쩌다 콩순이에서 개털로 글이 흘렀다. 그렇지만 이 모두는 나, 한국인과 다른 그의 이국적인 외모 덕분에 흐른 나의 사유들. 그가 한국인이었다면 이런 글은 쓸 수 없었을 테지.
새삼 남편의 껍질을 훑는다.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나와 그리고 전부와 다른 외모로 한국, 그것도 서울에 남아 이방인으로 사는 훈의 이질적 외모를 떠올린다. 그의 ‘아시안 뷰티’인 나는 과연 아시안 뷰티가 맞을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며. 그러다 바닥에 깔린 훈의 흔적을 진공으로 빨아들였다(열라 많았다).
저녁이면 그 이탈리아 사람처럼 생긴 외국인 남성은 비밀번호 4자리를 누르고 이 집에 들어올 것이다. 콩순이처럼 눈이 짙고 코는 우뚝 솟았으며, 반나절 동안 성큼 자라 있을 수염, 몸 털과 함께.
This is exotic Life!
부부는 닮는다지만 내 가슴과 어깨죽지에는 털이 자라지 않기를 바라며.
위는 네이버 연재 중인 글로, 원본에 해당합니다.